활판인쇄로 다시읽는
봄·봄 김유정 저, 책과인쇄박물관, 2019
봄·봄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히가 찼으니 성예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자식아! 성예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박이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자랐다니까 이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증 영문 모른다. 일을 좀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하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안죽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벙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있해면 있해,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 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예를 시켜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하랴 싶어서 군소리 없이 꾸벅꾸벅 일만 해 왔다.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채려서
"어 참, 너 일 많이 했다. 고만 장가드러라." 하고 살림도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이 아니냐.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그런 소리가 나올까 봐서 지레 펄펄 뛰고 이 야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일하기에 승겁기도 할 뿐더러 이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숙맥이 그걸 모르고 점순이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달리지 않었나.
언젠가는 하도 갑갑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 번 재 볼까, 했다마는 우리는 장인님이 내외를 해야한다고 해서 맞우 서 이야기도 한마디 하는 법 없다.
움물길에서 언제나 맞우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 보고는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미키두!"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은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말락 밤낮 요 모양이다. 개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 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뼉따귀가 음츠라드나부다. 하고 내가 넌즛넌즛이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소낭당에 돌을 올려 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 줍소사. 그러면 담에 떡 갖다놓고 고사드립죠니까."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먹은 킨지 이래도 막 무관해니- p6-8
또 사위에게 이 자식 저 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은 어디 있느냐. 오작해야 우리 동리에서 누굴 물논하고 그에게 욕을 안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고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라세놓고 욕필이(번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허나 인심을 정말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참봉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p10
옛말, 주인공의 말투가 살아있어 읽는 내내 집중하게 되고 마치 제가 주인공이 되어 점순이랑 성례를 하루 빨리 올렸음 싶게 만드는 문체네요. 장인에게 항변하는 주인공의 어정쩡한 몸짓과 어눌한 말투, 매번 키를 핑게대며 데릴사위를 부려먹는 장인님.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꼭꼭 씹어가며 맛나게 읽었습니다.
딸아이가 올봄 춘천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면서 들른 김유정 문학관에서 엄마 생각나서 샀다는 김유정 작가의 '봄봄'. 제가 최애하는 소설이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도 김유정 소설가입니다. 활판인쇄라니 생소하고 새롭기도 하고 예전 타자기 글자체로 책을 읽으니 옛날 느낌도 나고, 단면 인쇄라 읽는 속도가 느껴져서 좋네요.
종이책이나 전자책이 넘쳐나는 요즘, 활판 인쇄기를 사용해서 주조장인을 초빙해 기본활자를 준비하는데 꼬박 2년이라는 시간과 많은 자금을 들여 한 장, 한 장 책을 완성했다는 책과인쇄박물관 전용태 관장님. 시간을 거스르는 무모한 도전임을 알면서도 정감있는 책을 만들기 위한 애정에 이 시대에 이런 분들도 계시는구나 싶어 마음 한켠이 숨 쉴 공간을 찾은 느낌입니다.
책과인쇄박물관에서는 김유정 작가의 작품을 '봄봄', '동백꽃', '산골나그네' 세 권으로 나누어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을 한 장씩 넘겨가며 작가가 이 글을 썼던 시절을 떠올려보고 한 글자 한 글자 골라내서 조판한 문선공과 조판공의 손놀림을 떠올리며 귀하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