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엮어옮김, 서해문집, 2018.9.10.
스승은 앞장을 섰고 나는 그 험난한 여행을 시작했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한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나의 창조주는 정의로 움직이시어
전능한 힘과 한량없는 지혜,
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드셨다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나를 거쳐서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영원히 버려라.
거대한 문에 적힌 어두침침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뜻이 너무나 무서웠다. 베르길리우스는 내 심정을 안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는 네가 가진 모든 불신과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여기가 내가 말한 곳이지. 지성의 선을 잃은 자들, 비참한 무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평온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있었기에 나는 한결 안심이 되어 암흑 속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한숨과 울부짖음이 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에 울려퍼졌다. 알 수 없는 수많은 언어들,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목이 쉬도록 고통을 호소하고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철썩철썩 손바닥 치는 소리, 신음소리가 어우러져 아수라장을 만들었고, 회오리 바람에 휩쓸리는 모래알처럼 깜깜한 하늘에 그 소리가 떠돌고 있었다.
"지금 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의 삶은 치욕도 명예도 알지 못했네.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한 천사의 무리도 섞여 있지. 하늘은 하늘의 빛을 가리는 그들을 쫓아냈고, 깊은 지옥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그들을 보고 우쭐해할 것이기 때문이지."
"얼마나 고통을 받기에 이토록 울부짖는 거죠?"
"이들은 죽음조차 바랄 수가 없다. 앞을 볼 수 없는 생활은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늘 다른 운명을 부러워하고 있지. 그들이 지녔던 세속의 명성은 사라졌고 자비와 법은 그들을 비웃고 있어. 그냥 보고 지나치자."
그때 깃발 하나가 펄럭이며 빠르게 지나쳤다. 깃발을 따라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끝없는 행렬 속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교황이 된 지 5개월 만에 직무를 포기하고, 악랄한 보니파키우스 8세에게 직을 넘긴 코엘레스티누스 5세의 비겁한 영혼도 섞여 있었다. 그로 미루어, 하느님께나 그 반대자 모두에게 미움을 산 자들의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거대한 파리와 벌떼의 습격을 받아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는 눈물과 뒤섞여 다리로 흘러내렸고 구더기들이 고름에 뒤섞여 우글거렸다. 저편 강둑에는 다른 한 무리가 있었다.
"저들은 누구이며, 왜 저렇게 서둘러 강을 건너려 하지요?"
"우리가 아케론의 슬픈 강가에 가거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야."
스승님의 퉁명스러운 말에 당황한 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내 말이 그를 귀찮게 할까 걱정되어 강가에 이를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강가에 이르렀을 때 저편 강둑에서 흰 머리 노인이 배를 저어오며 외쳤다.
"사악한 자들에게 화 있으라! 너희는 하늘을 바라볼 희망을 버려라. 나는 너희를 저편 강둑, 불과 얼음의 지옥으로 실어가러 왔다. 그런데 거기 살아 있는 사람은 뭐냐! 어서 죽은 자들에게서 비켜나라!"
베르길리우스가 외쳤다.
"화내지 마시오, 카론! 이는 원하시는 대로 이루는 저 높은 곳에서 뜻하신 일이니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이 말은 검푸른 여울의 털복숭이 뱃사공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는 다만 불테를 두른 눈알을 굴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벌거벗은 지친 영혼들은 그의 혀에서 끔찍한 말이 쏟아져 나오자 몸시 창백해져서 이를 덜덜 떨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저주하고 그들 부모의 잠자리를 저주하며, 그들을 낳은 인류와 이땅, 시간, 피, 그리고 그들을 품었던 자궁을 저주했다. p21-23
.......
내 눈에 비친 것은 깎아지른 벼랑의 끄트머리였다. 그 밑으로는 깊은 나락의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끝없는 통곡이 우레를 모아놓은 듯 울리고 있었다.
깊게 드러워진 칠흑같은 어둠, 어렴풋하게나마 비춰주는 한 줄기 빛도 없었다. 바닥을 찾으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두운 눈먼 세계로 내려가자! 내가 먼저 갈테니 뒤를 따라 오너라!"
시인이 얼굴을 내게 돌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가 겁을 낼 때 날 위로하신 당신조차 두려워하는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무서운 게 아냐!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끝없는 불안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 그것이 내 안색을 연민으로 물들이고 있는 거야. 그것이 네게는 무서워하는 걸로 비쳤나 보군. 어서 가자! 갈 길이 멀어."
그가 나를 이끌고 들어갔다. 그곳은 나락의 첫번째 고리였다. 의외로 불평이나 울음, 비탄의 소리는 크게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한숨 소리만이 영겁의 허공을 언제까지라도 떨게 하고 있었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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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하느님의 세계로 여행을 시작한다.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의 문을 지나 아케론 강의 뱃사공 카론이 망자들을 실어나르는 배를 타고 지옥으로 들어간다. 지옥의 첫번째 고리에서는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성현과 철학자, 시인들이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세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 모여 있다. 총 아홉 개의 고리가 있는 지옥을 여행하면서 지옥에 떨어진 이들이 어떤 고통과 형벌을 받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단테는 천국에 있는 베아트리체의 호의로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의 여정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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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고리의 지옥에서 만난 사람들은 단테를 이렇게 표현했다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오는 당신은 누구요?
거기 누구냐? 어째서 이 사람은 죽지도 않았는데 죽은 자들의 왕국을 활보하는가?
너희들 저 뒤에 있는 놈 발에 채여 움직이는 돌을 보았나? 죽은 놈들의 발은 저렇게 못한다.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 희망이라곤 없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옥이 어떤 모습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단테의 상상력과 창의성에서 나온 글이라는 것. 어느 누구도 그곳에 가 본적이 없고,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해서 밝혀진 바는 한번도 없었다. 불교나 카톨릭이나 기독교나 어떤 종교든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 살아있을 때 했던 행동들에 따라 상을 받고 벌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을 뿐.
그렇지만 단테의 <신곡>을 읽었을 때 그 표현력과 고통받는 영혼들의 생생함은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서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좀 더 기쁘게, 즐겁게, 감사하면서 살아야할 이유를 떠올리게 되었다.
발에 채이는 돌도 살아있기에 채이는 것, 그림자를 갖는 것도, 호흡을 할 수 있는 것도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너무나 사소하고 매일 이루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기적일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