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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릉 칡소(사진 경상북도 울릉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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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 칡소(2)
이경애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울릉)
Ⅲ. 고려시대의 소
고려시대에 들어서 중앙에서는 권농 정책을 국가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기본 정책으로 삼고 권농사(勸農使)를 각 기관에 파견하여 농업을 지도하도록 했다. 또한 국가적으로 종자를 보급하고 농경에 필요한 수리시설을 확충했으며 농번기에는 백성들을 요역에 동원하지 않는 등 농업을 장려해서 생산력을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권농정책과 우경을 통한 깊이갈이 경작의 일반화로 인해 고려의 농업은 장정 5~6명 정도의 힘을 대신할 수 있었던 소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우(農牛)의 개체수는 충분하지 않아 소에 대한 도살금지령이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소의 대외 유출도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농우 확보를 위해 소 도살을 금지하는 것은 어느 왕조에서나 있었던 시책이지만, 고려의 경우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던 불교의 살생 금지 교리와 맞물리면서 소 도살금지령이 빈번히 시행되었다. 광종(光宗) 19년(968)부터 성종 7년(988), 문종 20년(1066), 예종 2년(1107), 충선왕 2년(1310), 공민왕 20년(1371) 등이 도살금지령을 내렸다. 특히 광종은 참소(讒訴)로 많은 이를 처벌한 것에 대한 회의(懷疑)와 그 죄를 씻기 위한 재회(齋會)를 널리 베풀었으며 이때 방생소(放生所)를 곳곳에 설치하고 사원에 불경을 강연케 하였으며 도살을 금지하였다. 문종의 경우 1066년 정월부터 무려 3년간 도살을 금지하였는데 이때 공물로 바치던 소가죽과 힘줄, 소뿔을 평포(平布)로 대신하게 하기도 하였다.
도살금지령을 어기는 것에 대한 처벌도 강력했다. 소를 죽인 자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을 구분하지 않고 얼굴에 낙인을 새기고 형이 집행된 후 멀리 떨어진 육지의 주현(州縣)에 편입시키는 율문(律文)이 실시되었으며, 고려 말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당하고 극심한 우마(牛馬)의 피해로 공민왕 11년(1362)에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이 설치되어 소나 말의 도살을 신고한 자에게 소를 도살한 이의 재산만큼 상금을 주고 범법자는 살인죄에 준하는 형벌을 내릴 만큼 엄격한 도살금지령이 실시되었다.
한편, 고려의 마지막 왕인 우왕(禹王) 시기에는 미륵불을 자처한 이금(伊金)이라는 승려가 소고기와 말고기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을 퍼트리기도 했으며, 나라에서 우유를 얻기 위해 유우소(乳牛所)라는 관청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시대까지 제도적으로 이어졌다.
Ⅳ. 조선시대의 소
조선시대 역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농업이 국가 근간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농번기에 노동력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고, 열 사람 정도의 노동력을 발휘하는 농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도 우경을 통한 깊이갈이가 주된 농업생산 방식이었는데, 깊이갈이를 하면 표토에 있는 잡초를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의 자양분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토양을 부드럽게 하고 통기성을 높여 파종과 김매기를 수월하게 하였고, 뿌리의 호흡과 생리작용을 원활하게 하여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게끔 했다. 이처럼 농경에 있어 소는 특히 기경(起耕)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성은 농업이 아니면 생업 할 수 없고, 농업은 소가 아니면 경작할 수 없다.’
‘비록 농부는 있더라도 만일 그 소가 없으면 진실로 대신 경작할 수 없습니다.’
‘땅이 오곡을 기르되 소로써 대신 경작하게 하였습니다.’
‘대저 큰 창고는 곡식을 들여다가 저장하는 그릇이고, 소는 곡식을 생산하는 도구입니다.’
- 世宗實錄 卷 36
위와 같은 실록의 기록은 조선시대 농경에 있어 소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소는 농사를 위한 거름 생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선 추수나 타작을 한 뒤 남은 부산물과 봄 여름에 베어둔 풀을 날마다 외양간에 깔아두고, 다음 날 아침 소 배설물과 함께 꺼내 쌓아 썩히고 나서 논밭의 거름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소 한 마리가 1년 동안 생산하는 거름의 양은 약 10t 정도라고 한다. 외양간에서 나오는 거름은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어 농업생산력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사육두수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농사에 충분히 투입될 정도로 많지 않았다.
“민가에 소가 있는 경우는 열 집에 한 집 정도이며 소가 있더라도 한 마리를 넘지 못한다.”라는 기록이나 “도내에 소가 귀하여 농사철이 되었는데도 백성들이 땅을 갈지 못합니다. 종종 논밭에서 소 대신 사람이 몸을 구부리고 쟁기를 끄는데, 10인의 힘이 소 한 마리 힘만도 못하니, 농사가 매우 염려됩니다.”라는 경상도 암행어사 조수익(趙守翼)의 보고에서와 같이 당시 조선에는 농우의 부족 현상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농우가 부족했던 요인으로 소 전염병 즉 우역(牛疫)의 발생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 우역이 발생한 시기를 살펴보면 중종(1541~1542년), 명종(1557년), 선조(1577년) 등을 확인할 수 있고 우역은 평안도에서 발생하여 황해도, 함경도, 경기도 등지로 확산되어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17세기에 들어와 우역의 발생빈도는 더욱 잦아졌으며 농우 손실도 커져갔다.
당시 우역으로 폐사된 소 마릿수를 보면 1,000마리 이상 폐사한 경우가 현종 때 8회, 숙종 때 6회, 영조 때에 1회 등이다. 특히 현종 6년 경상도 30개 읍에서 6,400마리가 폐사했으며, 현종 9년 함경도에서는 소와 말 18,000여 마리, 현종 11년 황해도에서는 1개월 동안에 8,000여 마리, 현종 12년에는 경상도에서 6,806마리, 숙종 9년에는 제주도에서 수만 마리가 우역으로 폐사했다.
인조 년간 “소 역병의 재앙이 매우 혹독하니, 하늘의 뜻이 백성의 목숨을 끊으려는 듯 합니다.” 라는 최명길(崔鳴吉)의 보고에서와 같이 우역으로 인한 소의 집단 폐사는 백성의 삶은 물론 국가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이에 중앙에서는 여러 목장에서 기르던 소를 피해지역에 보내 번식하게 하였으며, 우역이 발생한 시기에는 소를 도살한 자를 살인을 한 죄와 같이 취급하도록 법령을 만드는 등 소의 도살을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농사에 사용될 소의 감소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17세기 전반 우역으로 인한 많은 소의 폐사는 조선의 농업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초래했다. 소고기는 일상생활은 물론 제사와 잔치에 사용되었고, 소에서 산출되는 가죽과 힘줄 등은 각종 수공업에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소는 명나라나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 사이에 빈번히 교역되는 물화이기도 했다. 우역으로 사신에게 베푸는 잔치에 사용할 소고기를 수급하기 어려워 돼지고기, 노루와 사슴고기, 꿩고기 등으로 대체했고 제사에 쓸 중포(中脯)를 구할 수 없어 노루와 사슴고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소의 힘줄 공급이 끊어져 활을 만들기도 어려워졌다.
조선시대에 농우 부족 현상의 이유로 명나라, 청나라 그리고 일본으로의 소가죽, 즉 우피(牛皮)의 수출도 하나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태종 4년 조선은 명나라의 압력으로 소 10,000마리를 수출했고, 세종 14년에도 수천 마리를 수출하였다. 또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 부근에 거주민들은 곤궁함이 지속되자 중국 요동 지방의 야인(野人)들과 소의 밀무역이 성행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소의 유출을 막기 위해 법으로 국경 밖의 사람과 우마(牛馬)를 매매하지 못 하도록 금지하였고, 태종 7년에는 함경도와 평안도의 소는 화인(火印)을 찍고 대장에 등록하여 엄격히 관리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소와 우피의 수출 증가는 충분한 농우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 소는 농우로서의 가치가 컸기에 식용을 위해 사육되지 않았으며 허가받지 않는 불법 도살은 엄격히 금지하였다. 대개 농우로써의 생명이 끝나면 식용으로 이용되고 부산물은 다양한 용도로 전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풍속에 손님 대접과 제사 반찬에 있어 대신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쇠고기의 수요는 항상 끊이지 않았다.
이에 쇠고기만 전문적으로 파는 푸줏간인 현방(懸房)이 있었으며 이곳은 국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공식적인 가게로 시전(市廛)에 속하였다. 서울의 경우 현방이 23곳이나 있었으나, 밀도살 금지에 대한 무수히 많은 실록에서의 언급은 곧, 당시 쇠고기 수요가 얼마나 많은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종묘(宗廟)나 선농단(先農壇)의 제사와 같은 큰 제사에는 반드시 소를 사용하였다. 농사를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올려 풍년을 비는 행사인 선농제는 경칩(驚蟄)이후 해일(亥日)에 선농단에서 지냈다. 이때 임금이 친경(親耕)한 다음 제물로 쓴 소를 많은 참례자들이 골고루 음복하기 위해 뼈, 내장 등으로 국을 끓였는데 이 음식을 선농탕(先農湯) 또는 설렁탕이라 하였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