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랑베르,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문학동네, 2019.
성경은 루이가 맨 처음 접한 책이었다. 루이는 성경을 읽고 나서 읽고 싶은 책들을 구하기 위해 몽투아르의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그는 아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비밀스러운 매력을 발휘해 책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매력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으니 말이다. 루이는 스승 없이 독서만을 통해 배움의 길에 들어섰고, 어느덧 열 살이 되었다. 당시 흔치는 않아도, 돈 있는 집에서는 군 징집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행해지는 추첨에서 떨어진 경우를 대비해 미리 대리 복무자를 정해놓던 때였다. 그러나 가난한 피혁 제조인인 루이의 부모로서는 아들을 위해 사람을 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루이를 1807년, 블루아 근처 루아르 강변의 메르라는 작은 마을로 보냈다. 그곳의 주임사제가 바로 외삼촌이었다. 이 결정은 루이의 학구열뿐 아니라, 자식을 끔찍한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의 소망도 만족시켰다. 게다가 주위 사람들은 루이의 학문적 소양과 조숙한 지적 능력을 보며 그가 교회에서 입신출세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루이의 외삼촌은 학식 있는 오라토리오회 수도사였다. 루이는 삼 년쯤 외삼촌 집에 머물다가 1811년 초에 방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스탈 남작 부인의 후원으로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랑베르는 우연히 이 유명한 부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신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신은 버려진 천재가 가는 길을 평평하고 고르게 다져주니까. 그러나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표면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위대한 사람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사건들은 순전히 물리적인 현상으로 보일 따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기 작가에게 천재적인 인물은 군중 속에서도 우뚝 솟아 보인다. 그것은 마치 들판에 찬란히 솟아 있는 아름다운 초목이 식물학자의 시선을 끄는 것과도 같다. 이 비유를 루이 랑베르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외삼촌의 허락을 받아 부모님 댁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또래 아이들처럼 아무것도 안 하면서 빈둥거리는, 누구한테나 유혹적인 무위도식에 빠지는 대신, 그는 아침 일찍부터 빵과 책을 챙겨서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책도 읽고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아들이 공부만 하는 것이 어머니의 눈에는 몹시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어머니들의 놀라운 직관이란! 그때부터 독서는 루이에게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일종의 갈망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의 책을 섭렵했다. 종교, 역사, 철학 그리고 물리 책 들을 즐겨 읽었다. 한번은 달리 읽을 책이 없어 사전을 읽으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그가 정말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명사의 여러 가지 뜻을 찾으면서 숱하게 즐거움을 느껴보지 않은 학생이 있을까? 한 단어에 대한 분석, 단어의 모양, 단어의 역사. 이런 것들은 랑베르에게 오랜 몽상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몽상이 아니었다.
흔히 아이들은 본능적인 몽상을 통해 삶의 현상에 익숙해지고, 철학적 지각이나 도덕, 혹은 물리적 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름의 판단력을 키우기도 하고 성격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이의 몽상은 결코 본능적인 것이 아니었다.
루이는 주위의 현상을 한눈에 파악할 줄 알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원시인과 같은 통찰력을 가지고 그 현상의 근원과 원칙과 결과를 동시에 궁리하여 설명하곤 했다. 그리하여 종종 자연이 심술을 부려 자연이라는 존재의 변칙을 증명해 보이는 현상을 그는 이미 열네 살 때 쉽게 설명해냈다. 물론 나는 그 뒤로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그 사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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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명상 그리고 독서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스스로 깨우친 소년 루이 랑베르에게 방돔 기숙학교라는 기존 사회질서를 가르치는 학교는 거대한 벽이었고 틀이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우주의 흐름을 호흡하고 느끼던 루이에게 교실은 감옥 그 자체였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구름을 보며 명상하는 것도 금지되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루이는 학교에서 점점 빛을 잃어갔고 사유를 드러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학교라는, 사회를 학습시키는 모든 시대, 사회에 존재하는 교육기관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채벌이나 따돌림, 폭력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루이 랑베르’는 발자크의 어린시절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합니다. 단어에 대한, 앎에 대한 총명함. 지(지혜, 知)에 대한 사랑, 즉 철학적인 소년의 아픈 성장기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