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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4)/홍영선

조진향 기자 입력 2026.01.23 12:07 수정 2026.02.07 02:17

↑↑ 사진 출처 (사)대구문화유산


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3)


홍영선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군위)


Ⅲ. 임란 의병장 장사진의 진몰(陣歿)한 사신(捨身)정신


5. 장사진 의병장 추모사업 유적

 임진왜란 당시 군위·인동지역 의병장이었던 장사진의 충성스러운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효령면 병수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고리비(故里碑)와, 오천리 충렬사’를 함께 묶어, 경상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고리비는 1753년(영조 29년) 당시 군위 현감이던 의령인 남태보(南泰普)가 비문을 지었다. 기념비의 규모는 높이 110cm, 폭 88cm의 화강암으로 고리비 앞면에는 <국상증수장사진고리國殤贈水使張士珍故里>라고 각자 돼 있다. 뒷면 음기(陰記)에는 비문이 있고, 마지막에 지은 연도인 “만력재임진사십유이년, 계유 팔월, 의령 남태보 근지, 萬曆再壬辰四十有二年, 癸酉[1753년]八月, 宜寧 南泰普 謹識” 로 되어있다.

 오천리에 있는 충렬사는 1868년(고종 5년) 서원철폐령에 철거되었다가, 1889년(고종 26년) 충렬사 뒷편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초가 3칸를 지었다. 1937년 효령면을 중심으로 6개 문중이 주관하여 옛 제단 터에 고쳐 지었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사를 지냈다.

 충렬사 중건기(重建記)에 의하면 “사림들의 공의가 있어 구지(舊址)에 제단을 설치하여 제향하고, 초가집을 지어 사당(社堂)을 삼았더니, 세월이 오래되어 3칸의 초가집이 무너지자, 행인들이 귀리와 보리만 무성함을 탄식하여 지사(志士)들의 감회가 있어 1937년(丁丑年) 봄에 당시 당장(堂長)인 용궁인(龍宮人) 최봉한(崔鳳漢)이 주관하여 초가를 기와로 개량하고자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역원(役員)들의 명단을 보면 6개 문중이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렬사 뒷편에는 의관장(衣冠葬)한 제단(祭壇) 앞에는 제단비가 세워져 있다. 제단비 앞면에 <증수군절도사장공제단비 贈水軍節度使張公祭壇碑>라 하였고, 음기(陰記)에는 비문이 있다. 마지막에는 문소(聞韶) 김홍락(金鴻洛) 근찬(謹撰), 유학(幼學) 영양(永陽) 최종한(崔宗瀚) 근서(謹書)가 있다. 측면에 壬午[1942年] 한식일(寒食日), 입(立)이라 하여, 지은 자와, 쓰신 분, 세운 연도를 확인할 수 있다.

1) 충렬사 중건기문

 우리나라 임진왜란[1592년]의 역사(役事)에 묘당(廟堂)에는 어모(禦侮)의 신하가 있었고, 초야(草野)에는 왕의 군사에 부지런히 일어나고, 임금을 위하여 적개심(敵愾心)이 치솟아 대의(大義)에 엎어진 자가 대개 한정이 있으랴마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장공(張公)도 그 중에 한분이다. 공은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한결 같이 충의에 부합되었으니, 그가 본래 축적된 것이었으며, 갑자기 왜놈들의 난을 당하자 분발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칼을 차고 먼저 창기(倡起)하여 중곡(中谷) 아래에서 적의 목을 베고, 영천성(永川城)에서 승첩(勝捷)을 하고 또한 군위 현감 류철(柳澈)과 더불어 방략(方略)을 많이 세우고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으니, 서애(西厓) 류선생은 『징비록(懲毖錄)』에서 “군위 한 구역은 장사진의 힘을 입어 온전하게 되었다.”고 기록되다. 만오(晩悟) 신선생(申先生, 申達道)이 본군의 현감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하기를 “읍의 일이 이 지경까지 어찌하여 일찍이 장사진과 의논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더니 당시의 위무(威武)가 혁혁하였음을 가희 알 것이다. 불행하게 마추현 고개 싸움에서 척후병(斥堠兵)이 잘못하여 적중에 빠져 화살은 떨어지고 힘도 다하여 돌아갔으니 아! 슬프고 애석하도다. 난이 평정된 뒤에 조정에서 벼슬을 추증하고 공훈을 기록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니, 국가의 풍습을 수립하고 충렬을 장려함이 가히 지극하였다고 하겠으나 무진년[1868년]에 국가에서 서원철폐를 명령함으로 훼철을 면치 못하였으니, 충신이나 의사의 혼백이 거의 굶주리게 되었다가 다행하게 사림(士林)들의 공의가 있어서 그 구지(舊址)에 설단(設壇)하여 제향하고 초가집을 지어 사당(社堂)을 삼았더니 세월이 오래되어 3칸의 초가집이 무너지자, 행인들이 빈터에 귀리와 보리만 무성함을 탄식하여 지사(志士)들이 감회를 느껴서 정축년[1937년] 봄에 내가[최봉한, 자신] 욕되게도 당임(堂任)으로 있으며 동지들과 협의하여 말하기를 “이 당은 300년 충렬의 행적인데 풍우(風雨)에 견디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당에 인사들이 참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슬프구나, 옳다”고 하였기에 그제야 터를 닦고 재물을 모아 초가를 기와로 개량함에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일을 마치게 되었다. 당실과 주방이 반듯하고 계단의 섬돌이 정비되어 오르고 내림이 정연하여 당의 형색이 이루어져서 마을 앞 계봉(桂峰)은 참으로 인극(釼戟)이 삼열(森列)같고, 병수(屛水)는 솟구쳐 병마(兵馬)가 성[怒]을 내어 달아나는 것 같아 당의 정신을 묘사하여 내는 듯하였다. 그제야 한마디 마추현에서 말하기를 “지난 일은 다시 증빙할 수 없고, 옛사람은 다시 볼 수 없으나 오직 만고(萬古)에 뻗어서 마멸(磨滅)되지 아니하는 것은 공의 충의일 뿐이다. 무릇 여러 임원들은 모두가 공의 충의로 마음을 삼는다면 이 당을 출입하는 근본의 뜻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이 당을 중건한 것이 아마도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삼강(三綱)을 확립하는 처지에 도움이 될 것이니 서로 힘쓰지 아니하랴”고 하였다.

“國朝龍蛇之役廟有禦侮之臣草野興勤王之師敵王愾而仗大義者盖亦何限而水軍節度使張公即其一也. 公慷慨有大志一副忠義其素所蓄積而倅當島訌奮不顧身伏釰先倡斬賊於中谷之下勝捷於永陽之城又與柳縣監澈多劃方略累立雄功所以西厓先生懲毖錄有軍威一境賴張士珍得全之語晩梧申先生與本倅書曰邑事至此何不早議於張某云云 當時威武之赫赫從可知矣. 不幸磨椎一戰以其斥堠之不仁陷於賊中矢盡力窮而死鳴乎惜哉. 亂定後朝廷追爵而勳之立祠而俎豆之國家之樹風獎節可謂至矣 而一自戊辰邦禁之後未免啜毁忠臣義士之魄幾至餒矣 何幸士林之公義不死即其舊址設壇而享之築茅而社之年深歲久三間之茅又從而頹圮行人切燕麥之歎志士有遺墟之感 歲丁丑春余忝在堂任慨然謀於同志曰此堂三百年忠烈之蹟不勝風雨豈吾堂人士之所忍乎. 僉曰噫噫唯唯乃拓基鳩財改茅以瓦始役於春告功於夏堂廚間架井井階, 氏所, 之升降秩自成堂之形色桂峰眞如釰戟之森列屛水激如兵馬之怒馳摸出堂之精神乃以一言言于磨曰往事不可復憑古人不可復見而惟亘萬古不磨滅者公之忠義也. 凡我僉員皆以公之忠義爲心即無愧乎出入斯堂之本意而斯堂之重建庶有助于敦風立綱之地矣盖相勖哉.”
歲丁丑流火節 龍宮 崔鳳漢 謹識.


2) 증 수군절도사 장공 제단비 축시

정인환(鄭寅煥), 作
임진란의 오랜 세월은 비석에서 증명이 되고 龍蛇風雨證於碑
천고애 더욱 빛나는 것은 한조각 비로다. 千古尤光一片碑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죽으니 남긴 한 있고, 未捷身亡遺恨在
행인들은 세워진 비문을 읽고 눈물이 떨어지도다. 行人墮淚讚荒碑

3) 증 수군절도사 장공 제단 비문(贈 水軍節度使 張公 祭壇碑文)

 내가 일찍이 남쪽 선비들과 종유하며 들으니, 수군절도사 장공은 글만 읽던 선비[白面書生]로 의병을 창의하여 임진·계사년[1592~1593]에 공을 세운 것이 오래되었다. 지금 실기(實記)를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사진(士珍), 성은 장씨로 관향은 옥산(玉山:[仁同])이다. 고려 시대 호위 대장군 장금용(張金用)이 공의 상조(上祖)이고, 덕녕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가 중조(中祖)이고, 죽정(竹亭) 휘(諱) 잠(潛)이 종조(從祖)이시다.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타인의 급함에 의를 행하였으며,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 내달리는 말을 쫓아가 타고, 놀란 사슴을 맨손으로 치니, 향리의 아는 자[識者]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성동면 오산동(烏山洞, 梧川洞)에 우거(寓居) 하고 있을 때 졸지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향병 100여 인을 모아 거느리고 복수군(復讎軍)이라 일컫고 군위현 남쪽 마추현(磨槌峴)을 지키며, 혹 훈련된 군사로 기습해 죽이거나, 혹 유격병으로 습격하여 머리를 베는 것이 심히 많았다. 서애(西厓) 류선생(柳先生)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 “군위 한 지역은 장 모씨(張某氏)에 힘 얻어 온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만오(晩悟) 신선생(申先生, 申達道, 1576~1631)의 종조형(從祖兄)인 정봉[鼎峰, 신홍도(申弘道, 1558~1612)] 공에 대한 행장(行狀)에서 말하기를 “첨사(僉使) 배경남(裵慶男)이 여러 산곡(山谷)을 끼고서 나아가 격전할 뜻이 없자, 정봉공이 순찰사에게 배경남의 상황을 진술하고 장사진으로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이어서 군위 현감 류철(柳澈, 1591.12~1597.2 재임)과 더불어 방략(方略)을 도왔다. 하루는 척후병(斥堠兵)의 잘못으로 복병(伏兵)을 만나서 적진에 빠져 화살은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죽었으니, 아! 열렬하도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작위를 추증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사림이 추중(推重)하니, 조정의 포상과 높임이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무진년(戊辰年, 1868년)에 서원 훼철 명령으로 인하여 지금 300년간 편안하던 장소가 10여 년간 규맥(葵麥)의 장이 되었다. 다행히 지난 경오년(庚午年, 1930년)에 사림의 논의가 격렬히 일어나 옛터에 제단을 쌓고 제향을 드리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아! 슬프다. 진실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의기가 하나도 멸하지 않음이 아니라면, 사람의 심흉격(心胸膈)으로 하여금 감격을 어찌 능히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루는 본손 재환(在煥)씨가 옛 비석이 착락(錯落)함을 한탄하여 장차 개수(改竪)할 뜻을 집안 어른들과 함께 모의(謀議)하고서 상권(相權), 주환(柱煥)을 시켜서 나에게 찾아와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얼마 남지 않은 덧없는 여생이고 또 늙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오직 장공(張公)의 뜻한 충정은 영원히 민멸(泯滅)됨에 이르지 않으니 대략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서술하고 명(銘)을 잇는다.

아아! 혁혁한 장공이여 於赫張公
열렬한 그 충절 이었다 烈烈其忠
분연히 한차례 일어나 奮然一起
가는 곳마다 공을 이루어도다 隨處成功
유자로서 무덕을 쫓았고 用儒從武
의리로서 힘을 다했도다. 激義爲力
화살로 죽이고 붙잡아 죽이고 射殪捕斬
몸을 받쳐 순국하였다. 忘身殉國
마추현 한 경계 구역은 一區磨峴
천고에 우러러볼 언덕이도다. 千古睢陽
우뚝한 저 오산마을에 截彼烏山
그 향기가 향긋하게 풍기도다. 苾芬其香
옛 비석이 벗겨지고 떨어져 舊碑剝錯
새로운 빗돌에 밝게 새겼도다. 昭刻新石
하물며 지금 사람은 矧今之人
감히 공경하며 경의를 표하지 않겠나? 敢不敬式
통정대부 전행 홍문관 시강 겸 지제고
원임 비서감랑 문소 김홍락 근찬
유학 영양 최종한 근서
임오(壬午, 1942년) 한식일(寒食日) 立[세움]

余嘗從南士友得聞水軍節度使張公 以白面書生倡起義旅 樹勳壬癸者久矣. 今按實紀公諱士珍 張氏貫玉山 高麗虎衛大將軍金用其上祖也. 德寧府尹安世中祖也. 竹亭諱潛其從祖也. 公事親孝急人義 又勇力絶倫趕及奔馬手擊駭鹿 鄕里識者異之. 寓居城東面烏山洞 猝當島訌 收率鄕兵百餘人號復讐軍 守縣南磨椎峴或治兵掩殺 或游兵襲擊 其所斬馘甚多. 西厓柳先生懲毖錄有曰 軍威一境賴張某獲全. 晩悟申先生狀其從祖兄鼎峰公文曰 僉使裵慶男擁衆山谷 無意進戰 公書陳慶男狀于巡察使 請以張某代之云 公仍與柳侯澈協贊方略 一日以其斥堠之不善 遇伏而陷於敵 矢窮力盡而死 於乎烈哉 朝廷嘉其忠節. 贈是爵立其社而俎豆之 當時士林之推重. 朝家之褒崇 可謂盛矣 而拘於戊辰撤令 三百年妥安之所爲幾十歲葵麥之場 何幸舊庚午士論峻發 仍舊址築壇設亨不替于今 噫苟非亘古今不診滅一義氣 令人心膈間感激 烏能爾哉 日本孫在煥恨其舊碑之錯落 將以改竪之意合謀堂中 使相權柱煥請余顯刻之文 余以桑海餘生 又此耄廢不敢當是役 而惟秉彛之衷不至永泯略叙所感如此 系以銘曰.
於赫張公, 烈烈其忠. 奮然一起, 隨處成功. 用儒從武, 激義爲力.
射殪捕斬, 忘身殉國. 一區磨峴, 千古睢陽. 截彼烏山, 苾芬其香.
舊碑剝錯, 昭刻新石. 矧今之人, 敢不敬式.
通政大夫前行弘文館侍講兼知制誥ㅜ原任秘書監郞 聞韶 金鴻洛 謹撰
幼學 永陽 崔宗瀚 謹書
壬午 寒食日 立


Ⅳ. 마치면서

 스승인 장현광은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도량과 식견이 넓고 컸으며, 역리(易理)에 더욱 정통하여 당대의 명유(名儒)가 되었다.”는 논평이 실록에 실려 있기도 하다. 임금은 여러 차례 그를 불러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그 역시 몇 차례 장문(長文)의 상소를 올린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과거(科擧)를 보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전염했고, 여러번 부름을 받고 지방 수령은 물론이고 대사헌 우참찬까지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졸기(卒記)에 그의 저서 『역학도설』과 『성리학설』을 깊이 공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현상도 이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왕이 그의 의견을 높이 사서, 특별한 대우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헌 선생의 제자 장사진의 기록을 살펴보면 영리(營吏)로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의 막료였던 이탁영(李擢英, 1541~1610)의 일기 『정만록(征蠻錄)』에 임진년 7월 25일자 장계(狀啓)에 “의흥(義興)은 품관(品官) 박연(朴淵)을, 군위는 품관 장사진 등 모두 수성장(守城將)으로 정하고, 한 읍의 군무를 맡아 처리하도록 하였다.[義興叚, 品官朴淵, 軍威叚品官張士珍, 並只守城將定體, 凡一邑軍務等事]”,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군위의 경계가 온전한 것은 오르지 張장군의 힘이다.” 하였고, 만오(晩悟) 신달도(申達道, 1576~1631)는 “군위현감 류철(柳澈, 1591.12.~1597.2 재임)에게 서한을 보내 고을 일이 어려움에 처하였을때 張의병장과 의논하지 않는가”하였음을 볼 때 혁혁한 위무(威武)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군위군지』에 “명나라 지원군이 인동지역의 지휘관으로 기개가 있고, 글 잘 쓰는 사람을 청할 때에 장사진을 추천한바 진중(陣中)에서 격문(檄文)을 쓰게 하였는데 희미한 달빛 아래 나는 듯 비호(飛虎)같이 글을 쓰니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쓰는 늠름한 모습을 보고 모두 탄복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수군절도사실기』 <장사진 일대기>에 “張 장군은 1572년(선조 5년) 현, 효령면[성동면] 병수리에서 장륜(張崙)의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하였고, 1592년 9월 30일 진중(陣中)에서 전사하였으니 나이 20세이다. <장의사 고리비> 음기(陰記)에도 “죽을 때 나이 겨우 약관(弱冠, 20세)이니 아내[室人]을 두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군위군지』와 『적라지』에도 “후손이 없어 족당이 다만 의관장(衣冠葬)으로 보냈다”고 하였음을 볼 때 후사가 없어 더욱 기록이 민멸(泯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무원종공신록』에 의하면, “판관(判官) 장사진, 2등”에 기록[녹권원문18쪽, 6행]되었다. 그러나 『선무공신』 1등에 이순신, 권율, 원균, 이상 3명이고, 2등에 신점(申點), 권응수(權應銖),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馣), 이억기(李億祺), 이상 5명이고, 3등에 정기원(鄭期遠) 등 10명이다.

 명나라 동정군(東征軍)의 출동이 신점(申點) 한 사람의 공이라고만 본다는 말인가? 곽재우, 조헌, 고경명, 김천일, 김면, 정문부, 류종개, 장사진 등의 의병장은 한 사람도 없으니, 국방을 다루던 군신들이 얼마 가지 않아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을 자초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할 것이다. 전후 7년 동안의 이 전란에 문무 장상(將相) 중에 단 18명만이 ‘선무공신’이 있다면, 이는 분명 패군망졸(敗軍亡卒)한 나라 골이 아닐까?

 이상과 같이 장사진 장군의 전공을 살펴보면 여헌 선생에게 배운 진퇴(進退)의 도리를 실천하였다. 이것은 『맹자』에서 말한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사생취의정신(捨生取義精神)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죽음도 싫어하는 바이지만,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환란(患難)을 피하지 않는 바가 있는 것이다.” 20세의 나이에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리는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은 분명 조상으로부터 면면히 품부(稟賦) 받은 것으로, 바로 병이(秉彝)와 의리(義理)로 죽기를 싫어하면서도, 피하지 않는 양심(良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청사(靑史)에 길이 일월쟁광(日月爭光)으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선조, 광해, 인조>, 『선조수정실록』, 『선조중흥지』, 『난중잡록』, 『징비록』, 『정만록』, 『선무원종공신록』, 『임진전란사』, 『적라지』, 『군위군지』, 『옥산지』, 『인동장씨대동보』, 『인동장씨충렬공파보』 『水軍節度使實記』, 『軍威文化遺蹟誌』 等


이상으로 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를 모두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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