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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화 태백산사고지(사진 1993년 봉화군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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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태백산사고의 복원을 기대하며(1)
Ⅰ. 머리말
우리 경북 봉화에는 조선시대의 실록을 보관하던 봉화태백산사고가 있었다. 해방을 전후한 혼란기에 소실되어 그 자리만 남아있다. 전국의 5개 사고 중 하나로 소중한 기록문화를 보존하던 사고의 복원을 위하여 여러 노력이 있었지만 그 실현이 지지부진함이 안타깝다. 시고(史庫) 복원은 경북도민의 간절한 소망으로 앞으로 전 도민의 힘으로 봉화태백산사고의 복원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본고에서는 실록의 보관을 위한 선인들의 노력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봉화태백산사고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해 본다.
1. 사고(史庫)
사고(史庫)는 조선시대 『왕조실록』과 국가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던, 지금으로 말하면 ‘국립 문서 보관소(The National Arechive)’격인 곳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사고에 보관한 핵심 서적은 완질(完帙 고종 순종 포함) 의 분량이 2124권 948책(冊)이고, 봉화태백산 본은 1893권 888책(冊1)에 달하는 막대한 『조선왕조실록』이다.
왕조 국가인 조선의 공식 국가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법률, 외교, 국방, 생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록문화의 정수(精髓)이다. 1978년 12월 8일 국보로 지정 되였고, 198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실록의 편찬
조선왕조실록 편찬은 역대 국왕의 사후(死後)에 전(前)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방식을 취했다. 국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수찬(修撰)과 편수(編修)를 맡은 영사(領事), 감사(監事), 수찬관, 편수관, 기사관 등의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등을 기초로 실록을 편찬 간행했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春秋館)에서 봉안 의식을 치른 후 도성인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1부씩 따로 보관했다.
3. 조선 전기 실록 보관 장소
조선 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보관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왜적의 침입 주로가 된 한양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병화의 피해를 입고 파괴되었다. 다만 전주 사고본 책들은 사고참봉(史庫參奉) 오희길(吳希吉, 1556~1623)과 전주 유생 손홍록(孫弘錄) 안의(安義) 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할 수가 있어 오늘날 온전한 실록이 복원될 수 있었다.
이에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제,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겪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은 병란 이후 지방 사고를 오지의 깊은 산속 삼재불입지(三災不立地)에 두도록 하였다.
4. 임진왜란 이후 실록의 보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왕실은 5사고제로 한양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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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록을 담아두었던 나무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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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태백산사고는 경상감사 류영순이 추천하여 선조 39년(1606)에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126–5번지(해발 1000m) 북동쪽 100m 지점인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에 사고(史庫)를 짓고 1913년까지 실록을 보관하여 왔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산성의 요새(要塞)에 있는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를 입고 정족산사고로 이전했다. 지방의 사고로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 조선말까지 지속되어 왔다.
5. 봉화태백산사고의 건물과 건물의 배치
봉화태백산사고지의 건물 배치는 능선에 둘러싸인 경사진 지형에 남쪽으로 축대를 쌓아 실록각과 선원각을 타원형의 담장 안에 동·서로 배치하고 담장 밖으로 포쇄각(曝曬閣: 암자로 추정)인 근천관이 있었으며 따로 떨어져 70m 높이의 대지 위에 한 채의 건물이 더 있었다. 봉화태백산사고는 중층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리고 지붕 각 마루에 양성을 하여 장중한 위엄을 지니고 있어 이 시기의 사고 건축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외관을 갖춘 건물이었다.
6. 수호 사찰의 지정
조선 왕실에서는 전국의 지역 사고 관리를 위하여 수호 사찰을 지정하고 사고를 수호하여 왔다. 전등사(정족산사고), 안국사(적상산사고), 각화사(태백산사고) 월정사(오대산사고)를 지정하고 수호 사찰에는 조정의 특혜로 역(役: 병역, 노역, 세금 부담)을 면제해 주었다.
각 사고에는 포쇄(曝曬)를 위해 의정부에서 관원을 보내 해당 지역의 군수와 협동으로 개고(開庫)하였는데, 봉화태백산사고의 경우 1898년부터 1910년까지 7회에 걸쳐 사고를 점검하였다고 한다. 봉화태백산사고에는 참봉과 십 수명의 수복(守僕)이 교대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수호 사찰인 각화사(覺華寺)에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각화사의 주지가 맡았고, 그 휘하에 승군 25명이 있었다. 사고에는 관료(官料)와 위전(位田)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봉화는 작은 고을로 사고를 수호하기에는 힘겨워 당시에는 안동에 속하였던 춘양면을 봉화에 붙여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요청한 일도 있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고 관리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은 왕조 말까지 지속되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