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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무용宮中舞踊 무고舞鼓 영해에서 만들어지다(2)/이영근

조진향 기자 입력 2026.03.18 13:25 수정 2026.03.18 13:26

↑↑ 악학궤범



궁중무용宮中舞踊 무고舞鼓 영해에서 만들어지다(2)

이영근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덕)

Ⅳ. 무고 탄생배경


1. 예향의 고장영해

 예로보터 영해지역은 경치가 뛰어난 고장으로 예악(禮樂)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고려말에 영해로 귀양 온 양촌 권근(權近)이란 분이 쓴 ‘영해 서문루기(寧海 西門樓記)’에 의하면 “정자와 루(樓)가 있는 곳에 경치가 마치 선경(仙境)과 같고 집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으면서 곡(曲)을 만드는 한편 거문고의 줄을 고르고 연주하는데도 뛰어나고 그 곡에 맞추어 노래하는 목소리와 춤추는 모양새는 맑고도 예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무고의 탄생도 이러한 영해인들의 문화 예술적인 재질과 바탕 위에 음악과 기예에 조예가 깊은 이혼(李混)이란 분이 당시 궁중에서 음악과 이론을 연구하던 악정(樂正)을 역임하다가 영해 부사로 내려와서 북을 만들고 기녀들을 뽑아 그 가락과 춤의 동작을 가르치면서 무고(舞鼓) 라는 무용을 만들었으니, 과연 궁중의 크고 작은 국가의식에 쓰일 명작품이 탄생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Ⅴ.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무고

무고(북춤)에 대한 유래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1274~1808)때의 시중(侍中) 이혼(李混, 1252~1312)의 북 제작설에서부터 비롯된다. 『고려사』 「악지」에는 영해(寧海) 귀양간 이혼이 마침 바다 위에 뜬 나무토막(浮査)을 건져 그것으로 북을 만들어 치니 그 소리가 굉장했고, 그 춤은 짝을 맞추어 돌아가는 변화가 마치 교교하게 꽃을 감싸고 날아드는 한 쌍의 나비 같았으며, 두 용이 구슬(여의주)을 다투는 것 같아서 당시 악부(樂部)에서는 가장 기묘한 것 이였다고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북춤이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며 용맹스럽고 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두 명의 무용수가 북 한 대를 둘러싸고 춤추었으며, 춤의 절차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무대(舞隊) 【검은 장삼】는 악관(樂官) 【붉은 옷】과 기녀(妓女) 【단장함】를 이끌고 남쪽에 선다. 악관들은 두 줄에 앉는다. 악관 2인이 북과 받침을 들어서 전(殿) 중앙에 놓는다. 여러 기녀들은 정읍사를 부르는데, 향악(鄕樂)에서 그 곡을 연주한다. 기녀 2인이 먼저 나아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북의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절한다. 끝나면 꿇어앉아 손을 여몄다가(斂手) 춤을 시작한다. 음악1성(成)을 기다려 두 기녀는 북채(鼓槌)를 잡고 북 옆의 좌우로 나뉘어 춤을 시작하는데 한번은 앞으로 한번은 뒤로한다. (그것이) 끝나면, 북을 감싸며 흑은 앞[面]쪽으로 혹은 등[背] 쪽으로 빙글빙글 돌며, 악절에 따라 북채로 북을 치는데, 장고와 더불어 서로 잘 맞춘다. 음악이 끝나면 그치고 음악은 철수한다. 두 기녀는 앞에서처럼 머리 숙여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이상의 『고려사』 「악지」 무고의 특징은 춤추는 기녀가 두 명이고, 기타의 단장한 여러 기녀는 정읍사를 노래[唱] 했다. 악관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두 줄로 나란히 앉았던 모양으로 보아 기본 인원은 약 10명 이내 일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사료는 무엇보다도 무고가 “북을 감싸며 흑은 앞[面] 쪽으로 혹은 등[背] 쪽으로 빙글빙글 돌며 악절에 따라 북채로 북을 치는데, 장고와 더불어 서로 잘 맞춘 춤”이라고 하고 있다. 이 때의 『고려사』 「악지」에는 “정읍사” 가사가 기록되지 않았고, 그 내용만을 요약하여 행상 나간 정읍 사람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무사귀환을 바라는 심정을 담은 노래라고 소개하였다.

↑↑ 고려사 악지


『고려사』 「악지」는 무고인 북춤의 유래를 제시한 자료이며, 북춤의 기본형은 북을 중심으로 무용수가 빙글빙글 돌며 북을 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무고의 유래는 이혼(李混)이 무고 북을 제작하였다는 이혼이 귀양살이 시기로 보는데. 대략 13세기를 그 기점으로 본다. 무고(舞鼓)는 고려시대 악부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었다. 이에 조선시대에도 무고는 적극 수용되어 잔치의 중요한 춤이 되었다. 『악학궤범』은 이런 춤에 대해 재주를 올린다는 의미로 통칭 정재(呈才)라고하였다.


Ⅵ. 『악학궤범』의 무고

1. 무고의 변천사

『악학궤범』 권5 향악정재도의(鄕樂呈才圖儀) 무고는 여덟 명의 기녀가 여덟 개의 북을 가운데 놓고 북을 치며 돌아가는 춤이다. 여덟 개의 북은 북의 표면에 청색, 홍색, 백색, 흑색의 원광(圓光)이 그려졌는데, 이것을 4방색(方色) 북이라고 하였다. 조선초기 무고의 형태와 구성 등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악학궤범』 원문과 그 번역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악사는 악공 16명을 거느리고 북[鼓]과 대(臺)를 받들고 동영(東楹)을 거쳐 전중(殿中)에 놓고 【먼저 북쪽에 놓고, 다음에 서쪽에 놓고, 다음에 동쪽에 놓고, 다음에 남쪽에 놓는다】나간다.북채(鼓槌) 16개를 안고 동영으로부터 들어와 그것들을 북 남쪽에 놓고 나간다.【북마다 2개】

제기(諸妓)가 정읍사를 부른다.

前腔 달하 노피곰 도샤 달아높이 돋으시어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멀리 비치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小葉 아으 아롱디리 아으 아롱디리
後腔 전(全)저재 녀러신고요 전 저자에 가 계신가요
어긔야 즌드l욜세라 어긔야 진 곳을 디디올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느 곳에나 놓으시라
金善調 어긔야 내 가논l 졈그셰라 어긔야 내(님) 가는 곳에 (날이)
저물세라
小葉 아으 아롱디리 아으 아롱디리

↑↑ 무고


악관이 정읍만기(井邑慢機)를 연주하면, 여기(舞妓) 8명【4명 또는 2사람이 하기도 하는데 임시하여 계품(啓禀)한다. ◦북이 8개나 4개인 경우에는 여기의 수가 북의 수와 같으나, 여기 2사람을 쓰는 경우에는 그 두 사람이 한 개의 북을 함께 친다】은 광렴(廣斂)으로 좌우로 나누어 나아가 북의 남쪽에 선다. 
북쪽을 향하여 가지런히 일렬로 꿇어앉아 엎드리고(俛伏) 일어서서 족도하고 꿇어 앉아 첨렴(尖斂)으로 고쳐 서서 춤을 춘다 【속칭 무답(舞踏)이다.】 끝나면 모두 염수하고 꿇어앉아 채를 잡고, 염수하고 일어서서 족도(足蹈)하여 무진(舞進)하고 【좌우의 밖에 선 여기가 먼저 나간다】. 좌우가 서로 이어져서 왼쪽으로 돌아(左旋) 북을 둘러 춤추면서 쌍성(雙聲)과 북편소리(舞聲)에 따라 무고를 친다. 정읍의 중기(中機)를 연주하여 음악소리(樂聲)가 점점 빨라지면, 장고의 쌍성을 걸러 북편 소리에만 따라 무고를 친다. 정읍의 급기(急機)를 연주할 때는 악사는 절차의 지속에 따라 1강 걸러 박(拍)을 친다. 여기 여덟 사람은 염수하고 물러가【좌우의 박에 선 여기가 먼저 물러간다】가지런히 일렬로 꿇어앉아 본디 있던 자리에 채를 놓고서 염수 광수(廣수)하고 일어서서 족도하고 꿇어앉아 부복하고 일어나 족도하고 물러가면 음악이 그친다. 악공 열여섯 사람은 북을 거두어 나간다. 악사가 들어와 채를 거두어 나간다.【궁중연에는 북과 채를 설치하고 철거하는 일을 모두 여기가 한다】

『악학궤범』의 무고 기록은 『고려사』 「악지」에서처럼 2인이 한 개의 북을 둘러싸고 추는 춤으로부터 4인이 4개의 북, 또는 8인이 8개의 북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결정은 계품(啓稟), 즉 임금에게 아뢰어 허락 받아서 연희하였다.

『악학궤범』이 제작 완성된 시기는 성종 24년(1493)이고, 『고려사』는 문종1년(1451)에 완성하여 단종 2년(1454)에 간행되었다. 무고는 『고려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책에는 가사가 없었고, 고려의 문화를 전승한 조선악의 실상이 『악학궤범』에서 발견된 것이다. 

즉 『고려사』 「악지」는 전조(前朝)의 악(樂)을 정리할 때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고, 그 악들 중에서 조선이 전승한 것만 『악학궤범』에 보다 자세히 기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무고의 반주 음악은 정읍만기(井邑慢機)와 중기(中機), 급기(急機)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느린 음악으로부터 점점 빨라지는 음악적 특징을 갖는다. 『악학궤범』을 전후하여 무고를 춤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상당히 많다. 큰 잔치라면 거의 반드시 갖추어 춤추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향악정재 무고는 조선 500년 춤 역사의 주요 종목이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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