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에 이어
또 하나는 몸근처 50미터로 돌아가서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로 시작해서 빠져 나올 때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 시를 열줄 쓴다면 한줄 만이라도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이컵이 종이컵이라고 끝나면 재현밖에 안된다. 재현은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찍거나 유튜브를 보는 게 훨씬 편하다.
왜 문학을 하느냐? 바꿔야 된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눈알을 거꾸로 박아야된다는 말이다. 눈알을 거꾸로 박고 나를 들여다보고 자신을 갱신하는 것, 시와 삶이 거의 같이 나간다면 빠져나오는 자리는 뭔가 뒤집어져 나와야 된다. 남을 뒤집으려면 내가 먼저 뒤집어져야 한다.
또 좋은 시들은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다 보여주면 포르노다. 에로틱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따오기 노래처럼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것, 그게 시에서도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점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 보여주면 설명하는 게 되고 설명하는 글은 예술이 아니다.
시의 길은 물수제비 뜨듯이 지붕에서 지붕을 건너는 전압이 높은 언어들이다. 그런 것을 간직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는 내가 쓰는가? 어때요? 내가 시를 쓴다고 생각해요? 뒤통수를 쳤던 게 좋은 시의 대부분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다. 대상 퍼스트다. 뭐냐면 대상이 불러주는 말을 잘 받아쓰면 된다. 그게 말이 쉽지 어려운 이야기인데,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어 나무가 쓸쓸해 보이더라. 쓸쓸한 나무, 나무가 쓸쓸한가? 나무가 쓸쓸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나무는 나무다.
좋은 시인들은 나무자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는다. 예를 들면 무당의 역할이다. 제가 경북 의성 출신인데 저와 같은 조그만 애가 익사해서 동재 소나무 앞에 건져 놓고 무당이 와서 굿을 하는데 그 무당이 어린애의 말을 한다. “엄마, 엄마, 숨 막혀 빨리 건져줘요” 무당이 아이의 말을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통곡을 한다. 그 기억이 생생하다. 무당은 무당의 말이 아니라 죽은 아이가 무당을 통해서 무당이 어린아이의 말을 하는 거다. 바로 그 지점이 돼야 한다.
고령도서관 앞 플라타너스가 시인을 통과해서 시인이 플라타너스의 말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 전 그게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내가 플라타너스를 가져와서 슬픈 플라타너스, 기분 좋을 때는 플라타너스가 춤춘다. 천만에요. 플라타너스가 어떻게 춤추고 슬퍼해요. 그런 지점으로 우리는 대상들을 섬겨야 한다. 대상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여기서 대상인 것은 삶에 있어서도 똑같다. 자식, 부모, 부부관계가 좋으려면 잘 들어줘야한다. 데레사 수녀님을 취재하려고 기자가 찾아왔는데 계속 기도만 하시더라. 기자가 데레사에게 “수녀님, 무슨 기도를 그렇게 오래 하십니까?”하고 물으니 데레사 수녀께서 “저는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물으니 “하느님도 저의 기도를 그냥 들어주시기만 하셨습니다”고 답하셨다.
그게 일종의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의 차이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기도한 것은 하느님, 부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 제 소리만, 지 소원만 빌었던 거다. 그게 일종의 묵상기도였다면 관상기도는 주님, 부처님이 나를 통과해서 나를 통해서 자기의 말을 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많이 들어주고 대상을 섬기고 그런 자리에서 좋은 시들이 찾아오고 좋은 예술가로서 마지막 입술의 형태를 보존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