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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漢陽趙氏)의 칠곡 입향 경위와 왜관읍 야득리의 유래(상)

조진향 기자 입력 2022.10.31 23:36 수정 2026.05.04 08:17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칠곡 입향 경위와 왜관읍 야득리의 유래(상)




1. 들어가면서

지금은 전원주택을 짓고 들어온 사람들도 있지만 석적읍 중지리(중마)는 한때 한양조씨 집성촌이었다. 명절이면 동리 어른들이나 타지에 나가 살던 친지들이 새벽부터 우리 집으로 몰려와 대청마루에서 다같이 절을 올렸고, 차례가 끝나면 김이 오르는 떡국과 전, 고기수육, 한과나 단술, 송편이 올라간 음복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 차례를 모실 집으로 가곤 했다. 아버지가 차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늘 해가 설핏 기울 무렵이었다.

석적읍 포남리에 윗대 조상의 재실이 있다고 어른들로부터 귀동냥으로 들었지만 재실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문득 본관이 한양(서울)인데 왜 한양이 아닌 경상도에 터를 잡았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선뜻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6.25전쟁 중에 피난왔거나, 그보다 앞서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짐작만 하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느라 바빴기에 그냥 묻히고 말았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얼마 전 손녀가 태어났다. 그제야 뿌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이번 기회에 조상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2. 중추공 조사(趙篩).

조상에 대한 단서는 ‘야득이 할아버지’와 포남1리에 있다는 재실이었다. 십여 년 전, 먼 친척이 지나가는 말로 야득이 할아버지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야득이’, ‘야드기’가 할아버지의 이름이거나 별명같은데, 왜 야득이(야드기) 할아버지라 불릴까 의문이 들긴 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국역 칠곡지, 매설헌선생실기, 한양조씨세보, 장릉사보 등 문헌도 찾아보았다. 그러자 왜관읍 야득리(야드기)가 자연부락이고, 중추공 조사 선생(이하 중추공)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자 선조들의 계보가 연결되고, 중추공이 왜 칠곡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칠곡문화원이 2002년 12월 20일 발행한 국역 칠곡지 4권 유행편(P269~270)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趙篩)의 본관은 한양(漢陽). 지평(持平)에 증직된 완규(完珪)의 차자로 어머니는 영인이씨, 부인은 의성김씨이다. 매죽헌(성삼문)과 문두(성담수)를 스승으로 섬겼다. 완규(完珪)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같은 여러 현인(賢人)과 더불어 단묘(端廟, 단종)를 도와 추대했다가 계유년(1453년)에 변군(邊郡)에 안치되고, 이듬해인 갑술(甲戌, 1454년)에 형을 받았다. 죄는 자손에게까지 뻗쳐 공의 나이 아직 동(童)도 되지 않았는데 경산(京山)의 종이 되어 노곡(蘆谷) 야득리(野得里)에 들어갔다. 사람을 향하여 말하거나 웃지 않고 하늘의 해와 달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마쳤다. 숙종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매설헌선생실기에 수록된 장후지 우윤 진주 유하원은 중추공이 의성김씨 문중에 사위가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썼다.

진사공의 집이 전복되어 어찌 사족으로 보전하기를 십여세나 하였는가. 생이 왈 방조 범(範)은 유고가 있어서 자손이 양주(楊州)와 연천(漣川) 등지에 있고, 선조 사(篩)는 동몽으로 성산에 유배되어 의성(義城) 진국상장(鎭國上將) 김양검(金良劍)의 손자 명리(命利)가 그 딸을 아내로 삼아 주니, 족척과 향리가 다 불가하다고 반대하였으나 김공(金公)이 충신의 자손이라 가히 버리지 못할 것이라 하며 사위로 맞았다. 


3. 매설헌 조완규와 그의 가족.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원년) 수양대군(세조)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김종서(金宗瑞) 부자와 황보인(皇甫仁) 등 반대파를 피살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이들과 역모했다는 거짓 고변으로 유배를 보내 사사(賜死)한 사건이다. 중추공의 부친인 매설헌에 대해 매설헌선생실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선생의 휘는 완규요, 호는 매설헌,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부의 휘는 영무(英茂). 영의정(領議政)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시 충무공(忠武公) 개국정사(開國定社) 좌리원훈(佐理元勳)으로 태종(太宗) 묘정에 배향됐고, 부친의 휘는 전(琠). 음남원부사(蔭南原府使)요, 모친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시조는 지수(之壽)인데 고려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요, 二世 휘 인재(麟才)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요, 三世 고조 휘 순후(珣厚)는 정헌대부(正憲大夫) 참찬(參贊) 문하부사(門下府事)요, 四世 증조 휘 세진(世珍)은 정헌대부(正憲大夫) 행예의판서(行禮儀判書) 증 좌의정(左議政) 한산백(漢山伯)이요, 五世 조의 휘 영무(英茂)는 영의정(領議政)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시 충무공(忠武公) 개국정사(開國定社) 좌리원훈(佐理元勳)으로 태종(太宗)묘정에 배향이고, 六世 고의 휘 전(琠)은 음남원부사(陰南原府使)요, 비는 양천허씨(陽川許氏)다. 매설헌은 시조로부터 七世이다. 두 아들 범(範)과 사(篩)는 八世이며, 함께 매죽헌(梅竹軒) 성(成)선생의 문인으로 부(父)와 사(師)로 인한 화가 뻗치어 아울러 성주(星州)에 거하였다. 九世 범(範)의 子는 윤진(允璡), 윤수(允璲)이고, 사(篩)의 子는 윤장(允璋), 윤령(允玲), 윤현(允玹)이다. 十世 윤진(允璡)은 무후(无后)하고, 윤수(允璲)의 子는 회(澮), 제(濟), 숙(淑), 항(沆), 한(瀚)이다. 윤장(允璋)의 子는 색(穡), 가(稼)이고, 윤령(允玲)의 子 준(稕)은 사평(司評)이고, 윤현(允玹)의 子 칭(稱)은 봉사(奉事)이다. 十一世 회(澮)의 子는 여림(汝霖)이고, 제(濟)와 숙(淑)은 무후(无后)하고, 항(沆)의 子는 일림(一霖), 한(瀚)의 子는 천림(天霖), 운림(雲霖), 경림(景霖)이다. 색(穡)의 子는 정국(定國), 안국(安國)이고, 가(稼)의 子 충국(忠國)은 사직(司直), 광국(匡國)은 진사(進士)이다. 준(稕)의 子 숙기(淑淇)는 참봉(參奉)이고, 칭(稱)의 子는 언복(彦福)이다.

한양조씨세보와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1456년) 9월 7일 갑술 4번째기사에 따르면 매설헌은 진사(進士)이며,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 증직되었다. 부인 영인이씨(令人李氏)와 슬하에 二男二女를 두었다. 子는 어모장군 범(範)과 첨지중추부사(僉地中樞府使) 사(篩)이고, 女는 요문(要文)과 가이(加伊)이다.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 휘 완주(完珠)는 아우(弟)이며, 누이(妹)는 정정(精正)이다. 종제(從弟)는 진사(進士) 월계당(月溪堂) 휘 종경(宗敬)과 호군(護軍) 백당공(栢堂公) 휘 수경(守敬), 익위사(翊衛司) 세마공(洗馬公) 휘 이경(以敬)이다.

장릉사보(莊陵史譜 卷之六) 열전보유(列傳補遺) 편에는 사헌부지평에 증직된 매설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설헌은 평소 안평대군과 친교를 맺고, 충정공(박팽년)과 충문공(성삼문)과도 벗이 되어 대군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다. 단종이 어려서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이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절재공(김종서)과는 자주 시사를 의논하였다. 안평대군은 매설헌을 한번 만나본 후 포의지교를 맺었는데, ‘‘行如直己 終三黜 事可興邦’*이라는 매설헌의 시를 보고 당시 사람들이 안평대군의 당으로 지목하였다. 단종이 어리고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이라 절제공이 공과 시사를 의논하다가 철여의가 평상에 있어 한 말씀을 하고 손으로 한마디를 끊으니 충의에서 우러난 분노 때문이라.

*‘行如直己 終三黜 事可興邦’은 ‘나라를 흥하게 하는 옳은 일이면 세 번 내쳐지더라도 끝까지 바르게 행하리라’는 매설헌의 절의를 나타내고 있다.

결국 매설헌은 강원도 회양에 유배·안치되었다가 이듬해(1454년 갑술년) 주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때 매설헌의 집은 한명회와 익현군 이관에게, 매설헌의 아내와 두 딸, 누이는 연좌되어 신숙주와 윤자운, 유사의 노비가 되었다. 어명을 듣고 매설헌의 부인 이씨와 딸은 신숙주의 노비로 준다는 어명을 듣고 샘에 투신하여 함께 목숨을 버렸다.

두 아들은 관노가 되어 경산부(지금의 성주)로 유배되었다. 큰 아들(趙範)은 몇 리를 못 가 피를 쏟으며 죽고, 그 아내 인천이씨는 홀로 자녀를 데리고 양주 해유리로 도망해 은거하였다. 둘째 아들(趙篩)은 어린 나이에 노곡 야득리에 들어갔다. 매설헌의 아우 판관공(趙完珠)은 여주읍으로 유배되었다가 공의 처교 소식을 듣고 따라 자처하였다. 종제 월계당(趙宗敬)은 동복에 유배되었다가 단종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순절하였고, 세마공(趙以敬)도 평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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