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비운의 왕 단종과 영월 장릉에 배식된 충신들.
수양대군은 단종 3년(1455년) 혜빈 양씨, 금성대군, 정종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며 이들을 귀양보내고, 근정전에서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세조로 즉위하였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인 세조 2년(1456년) 명나라 사신을 만나는 연회에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 신하들이 세조와 왕세자를 죽이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자, 다음 날(6월 2일) 성균관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세조를 찾아가 고변하여 연루된 수많은 신하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군로 유배되었다.
세조 3년(1457년) 9월에는 금성대군(유,瑜)이 순흥부 이보흠과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이를 빌미로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단종은 음력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세조 14년(1468년)에 매설헌의 조카 조가마이(趙加麻耳)·조삼원(趙三元)이 방면됐으며, 성종 2년(1471년)에 인동현(仁同縣)에 정속(定屬)된 매설헌의 아들 조범이(趙凡伊)·조사자(趙獅子)*가 석방되었다. 정조 15년(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 아래 배식단(配食壇)을 건립하여 충신 삼십이인(三十二人)을 제사하게 하였고, 계유(癸酉)·병자(丙子)·정축(丁丑)에 사사한 이백삼십육인(二百三十六人)의 충신들도 함께 흠향하였다. 매설헌은 조사위에 배식되었다. 익종대리(순조 28년, 1828년) 때 서울 선비 김이혁의 상언에 이어 영남의 15개 서원에서 동락서원에 통문을 보내 뜻을 모아 매설헌의 증직을 요청한 결과, 사헌부 지평이 증직되었다.
장릉사보(章陵史補)에는 계유년에 안평대군이 처형된 사유와 안평대군의 당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처결, 그 가족과 친지 등 연좌된 사람들에 대한 처결, 연좌된 부녀들을 정난공신에게 노비로 준 명단, 영월 장릉에 배식된 신하들의 명단이 있다.
|
 |
|
| ↑↑ 충신위 |
|
다음은 계유, 병자, 정축에 사사된 신하들의 명단이다.
정단 충신위에는 안평대군 장소공(章昭公) 용(瑢), 금성대군 정민공(貞愍公) 유(瑜), 화의군 충경공(忠景公) 영(瓔), 한남군 정도공(貞悼公) 어, 영풍군 정열공(貞烈公) 전(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양(李穰), 예조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행 병조판서 삼군도진무사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효전(鄭孝全), 증 의정부 영의정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증 영돈령부사 여량부원군 행 판돈령부사 정민공(貞愍公) 송현수(宋玹壽),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 인(皇甫 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조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판서(兵曹判書)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증 의정부 좌찬성 행 도총부도총관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 병조판서 별운검 충강공(忠剛公) 박쟁(朴崝), 증 의정부 좌찬성 행 형조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증 이조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증 이조판서 행 형조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증 이조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증 이조판서 행 예조참판 충열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증 이조판서 행 성균관 사예(司藝)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증 병조판서 행 도총부도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持平) 하백(河珀), 의정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증 홍문 부제학 행 집현전 부수찬 허조(許慥),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박계우(朴季愚), 증 이조판서 행 순흥부사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증 공조참판 영월군(寧越郡)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 등 총 32인이 배식되었다.
|
 |
|
| ↑↑ 조사위 |
|
조사위에는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 조수량(趙遂良),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 안완경(安完慶),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 이경유(李耕㽥), 의금부(義禁府) 진무(鎭撫) 원구(元矩), 집현전(集賢殿) 교리(敎理) 이현로(李賢老),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 윤처공(尹處恭),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 이명민(李命敏), 안악(安岳) 군사(郡事) 황의헌(黃義軒), 고양(高陽) 현감(縣監) 고덕칭(高德稱), 장신(將臣) 송석동(宋石仝), 형조정랑(刑曹正郞) 윤영손(尹令孫), 이조좌랑(吏曹佐郞) 심신(沈愼),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덕양정(德陽正) 이우량(李友諒), 지부(知部) 김승규(金承珪), 직장(直長) 김승벽(金承璧), 김목대(金木臺), 김석대(金石臺), 김조동(金祖同), 김수동(金壽同), 참판(參判) 황보 석(皇甫 錫), 직장(直長) 황보 흠(皇甫 欽), 황보 가마(皇甫 加麽), 황보 경근(皇甫 京斤), 헌납(獻納) 이승윤(李承胤), 이계조(李繼祖), 이소조(李紹祖) 이장군(李將軍), 목사(牧使) 이보인(李保仁), 호군(護軍) 이해(李諧), 이심(李諶), 이모(李謀), 이사문(李沙門), 이주령(李住令), 부령(部令) 이승로(李承老), 이의산(李義山), 이우경(李友敬), 민보창(閔甫昌), 민보해(閔保諧), 민보석(閔保釋), 민보흥(閔保興), 민석이(閔石伊), 군기감(軍器監) 녹사(綠事) 조번(趙藩), 조계동(趙季同), 조귀동(趙貴同,) 이물금(李勿金), 이계동(李季同), 이한산(李漢山), 이건금(李乾金), 이건옥(李乾玉), 이건철(李乾鐵), 윤경(尹涇), 윤위(尹渭), 윤탁(尹濯), 윤식(尹湜), 윤개동(尹介同), 윤효동(尹孝同), 감찰(監察) 정원석(鄭元碩), 참의(參議) 정효강(鄭孝康), 정백지(鄭白池), 황석동(黃石仝), 권구지(權仇之), 현감(縣監) 김현석(金玄錫), 부사(府使) 성삼빙(成三聘), 성삼고(成三顧), 정랑(正郞) 성삼성(成三省), 성맹첨(成孟詹), 성맹평(成孟平), 성맹종(成孟終), 성헌(成憲), 성택(成澤),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 조철산(趙哲山), 박숭문(朴崇文), 박계남(朴季男), 칙동(則同), 수찬(修撰) 박기년(朴耆年), 교리(校理) 박인년(朴引年), 박사(博士) 박대년(朴大年), 정랑(正郞) 박영년(朴永年), 생원(生員) 박헌(朴憲), 생원(生員) 박순(朴珣), 박분(朴奮), 점동(占同), 개동(丐同), 파록대(波彔大), 흔산(欣山), 사옹원(司饔院) 별좌(別坐) 봉여해(奉汝諧), 봉유(奉紐), 이공회(李公繪), 도진무(都鎭撫) 이유기(李裕基), 은산(銀山), 학유(學諭) 하기지(河紀地), 생원(生員) 하소지(河紹地), 하호(河琥), 류귀련(柳貴連), 류송련(柳松連), 유사수(兪思守), 허연령(許延齡), 허구령(許九齡), 송창(宋昌), 송녕(宋寧), 송안(宋安), 송태산(宋太山), 오을미(吾乙未), 청도(忠淸道) 절제사(節制使) 지정(池淨), 절제사(節制使) 조석강(趙石岡), 목사(牧使) 박이녕(朴以寧), 고양(高陽) 현감(縣監) 박하(朴夏), 하석(河石), 양옥(梁玉), 이차(李差), 안막동(安莫同), 최노(崔老), 김정(金晶), 김개질동(金介叱同), 김말생(金末生), 김산(金珊), 김호(金瑚), 김상충(金尙忠), 김득천(金得天), 김복천(金卜天),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석정(李石貞), 진사(進士) 조완규(趙完珪),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순생(趙順生), 불련(佛連),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조유례(趙由禮), 호군(護軍) 성문치(成文治), 이예숭(李禮崇), 김옥겸(金玉謙), 최영손(崔泳孫), 허수(許遂), 홍구성(洪九成), 홍옥봉(洪玉峯), 홍적(洪適), 이문(李聞), 진유번(陳有蕃), 최자척(崔自陟), 신맹지(申孟之), 신중지(申仲之), 신근지(申近之), 신경지(申敬之), 별시위(別侍衛) 이정상(李禎祥), 별시위(別侍衛) 이의영(李義英), 이말생(李末生), 중추원 녹사(中樞院錄事) 이지영(李智英), 이사이(李思怡), 최득지(崔得地), 최치지(崔致地), 최윤석(崔閏石), 최계동(崔季同), 최막동(崔莫同), 최석동(崔石同), 최철동(崔哲同), 최철산(崔哲山), 조청로(趙淸老), 조영서(趙榮緖), 황선보(黃善寶), 권서(權署), 권저(權著), 최사우(崔斯友), 이호(李昊), 성손(盛孫), 무손(茂孫), 김감(金堪), 김한지(金漢之), 김선지(金善之), 정관(鄭冠), 장귀남(張貴男),
장충(張冲), 최면(崔沔), 최시창(崔始昌), 심상좌(沈上佐), 김구지(金九知), 관찰사(觀察使) 유구산(庾龜山), 유오산(庾鰲山), 박수량(朴遂良), 이수정(李守禎), 임진성(任進誠), 이상손(李祥孫), 박양성(朴良誠), 학생(學生) 심희괄(沈希括), 학생(學生) 박수명(朴守明), 김죽(金竹), 김신례(金信禮), 유세(劉世), 강막동(姜莫同) 총 187인이 배식되었다.
|
 |
|
| ↑↑ 환관위 |
|
환관위에는 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 황경손(黃敬孫), 황장손(黃長孫), 고양 기관(高陽記官) 이식배(李植培), 귀진(貴珍), 고양 기관(高陽記官) 중은(仲銀), 순흥 품관(順興品官) 안순손(安順孫), 순흥 품관(順興品官) 김유성(金由性), 순흥 품관(順興品官) 안처강(安處强), 순흥 품관(順興品官) 안효우(安孝友), 순흥 기관(順興記官) 중재(仲才), 호인(好仁), 환관(宦官) 김연(金衍)·한숭(韓崧)·엄자치(嚴自治)·윤기(尹奇)·김충(金忠)·이귀(李貴)·인평(印平)·유대(柳臺)·박윤(朴閏)·길유선(吉由善)·조희(曺熙)·서성대(徐盛代)·김득성(金得誠)·김득상(金得祥)·최찬(崔粲), 맹인(盲人) 지화(池和)·나가을두(羅加乙豆), 이오(李午), 이내근(李乃斤), 이내철(李乃鐵), 김소동(金小童), 반인(伴人) 김유덕(金有德)·김대정(金大丁), 전농사노(典農寺奴) 목효지(睦孝智), 금성 관노(錦城官奴) 정유재(鄭有才)·범삼(凡三)·석정(石丁)·석구지(石仇之)·범이(凡伊), 순흥 군사(順興軍士) 황치(黃緻)·신극장(辛克長) 총 43인이 배식되었다.
|
 |
|
| ↑↑ 여인위 |
|
여인위에는 궁녀(宮女) 자개(者介), 궁비(宮婢) 아가지(阿加之)·불덕(佛德), 무녀(巫女) 용안(龍眼)·내은덕(內隱德)·덕비(德非) 등 총 6인이 배식되었다. 충신위 32인, 조사위 187인, 환자군노위 43인, 여인위 6인 등 총 268인의 배식되어 합동 위패가 모셔져 있다.
|
 |
|
| ↑↑ 매설당 |
|
|
 |
|
| ↑↑ 매설헌 조완규 선생 위패 |
|
|
 |
|
| ↑↑ 매설헌 단도비 |
|
|
 |
|
| ↑↑ 매설헌과 영인이씨 추모단소 |
|
|
 |
|
| ↑↑ 매설헌 선생의 부인 이씨에게 내린 교지 |
|
5. 매설당.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포망로 79-32)에는 매설헌(梅雪軒)의 추모지소인 매설당(梅雪堂)이 있다.
매설당에는 매설헌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향사를 드리고 있으며, 매월 음력 초하루(정월은 보름)에 분향을 올려 넋을 위로하고 선생을 기리고 있다. 건물 뒤쪽 우측에 단도비가 있고 좌측에는 매설헌 선생과 영인이씨를 기리는 충절단소가 있다. 부인 이씨 묘소가 광주시 퇴촌면 수동에 있어 후손들이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지령산에 단소를 마련하였다.
|
 |
|
| ↑↑ 야득리 유래비 |
|
6. 야득리 유래비.
왜관읍 금산리(錦山里)는 금무산(錦舞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금산’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경산부(지금의 성주)에 속했으며, 조선 시대 임진왜관 이후 칠곡도후부가 설치되면서 칠곡 노곡면(蘆谷面)에 속했다. 야디기(야득리)는 금산리 중심에 있는 마을로, 야득리 마을 초입에 야득리 유래비가 있지만 일반인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야득리 유래비의 비문이다.
<야득리 유래비>
이곳 야득리는 오백여년 깊은 역사를 지닌 유적지다. 조선 초기 첨지중추부사 조사 공이 살았던 마을이다. 중추공은 개국공신 조영무 공의 증손자이고, 불사이군으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계유지화를 당한 매설헌 조완규 선생의 차남이다. 중추공은 나이가 어려 영계죄로 이곳 성산에 유배되었다. 공은 남과 더불어 웃고 말하지 않으며, 하늘과 해를 보지 않고 삿갓을 쓰고 평생을 지냈다. 여기에 의성김씨 진국장군 양검의 손자인 명리가 고휼하여 그 따님으로 하여금 혼인하였다. 그후 김공이 충신혈맹은 의리를 끊지 못하리라 하여 재산을 내놓으니 공이 산야를 많이 얻었다하여 野得里(야득리)로 부르게 된 것이다. 고래의 선인지례를 잊지 않고자 이 고장의 유래를 새겨 전하노라. 한양조씨 인동파 경모제 중추공 종회 회장 조동환이 종중의 주선으로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워 야득리 유래를 잊지않고자 한다.
|
 |
|
| ↑↑ 경모재 |
|
7. 경모재(景慕齋).
<경모재>
경모재는 왜관읍 금산리 야득리(경북 칠곡군 왜관읍 강창2길 29-10, 야드기)에 있는 중추공 조사 선생을 기리는 재실로, 매년 음력 10월 첫 번째 일요일에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대청 마루 가운데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이 오래되어 낡았지만 제대로 관리할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
|
 |
|
| ↑↑ 중추공과 의성김씨 묘소 |
|
8. 중추공 묘소.
중추공 조사 선생의 묘소는 야득리 입구에 있는 야득리 유래비 왼쪽 터(현재는 인근 공장에 임대하여 공장 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끝에 있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100여 미터 거리에 중추공과 의성김씨의 묘소가 나란히 모셔져 있고, 우측에 묘비가 있다. 그리고 한양조씨 중추공파 종중사무실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 중앙로7길 14-2(왜관리 249-20) 2층에 있다.
9. 마무리하면서
중추공이 한양에서 경산부로 유배오게 된 연유와 계유와 병자·정축년에 일어난 왕위를 둘러싼 다툼을 살피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죄인으로 몰려 하루 아침에 노비로 전락한 어린 소년을 불쌍히 여기고 돌봐준 의성김씨 문중의 ‘명리’라는 분을 알게 되었다. 노비 신분을 벗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사위로 맞아들여 많은 땅과 재산을 내어 준 분이 있어 마음이 따뜻한 시간이었다.
참고문헌
국역 칠곡지(칠곡문화원, 2009)
칠곡군청 홈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칠곡문화대전
漆谷 鄕土史料 第六輯 漆谷 마을誌(개정판)(칠곡문화원, 2019.12.)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의 유훈과 계승(상)(한양조씨 판도공파종회, 2000)
莊陵史補 卷之六(正廟 丙辰後 一百十九年 甲寅 靑松方壺亭釐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