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성행상 접장 정한조 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漢祚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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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 230번지 크기|높이:82cm, 폭:20.3cm, 두께:1.7cm |
┃원문┃
소재지|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230번지
크기|높이:82cm, 폭:20.3cm, 두께:1.7cm
乃城行商接長 鄭漢祚 不忘碑(내성행상접장 정한조
불망비)
┃해설┃
당시 내성(乃城:봉화)에 살고 있던 접장 정한조가
그들의 상행위를 도와준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불망비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일명
‘선질꾼비’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 철재
동원령이 내려지자 “땅에 묻었다가 광복 후에
비각을 만들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국적인 보부상 단체들 중 봉화 내성장에서 쌀과 과일, 옷감 등을 울진 흥부장과 읍내장에서 해양 특산물과 교류하였는데 이들을 가리켜 내성행상이라고 한다. 17세기 이후 경제상황과 교통발달로 인해 시장은 10일장에서 5일장으로 자주 서게 되었고, 지방관청에서는 시장의 관세를 걷어 보부상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 내성행상 반수 권재만 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
┃원문┃
乃城行商班首 權在萬 不忘碑
(내성행상반수 권재만 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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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길 9 크기|높이:117cm, 너비:33cm, 두께:3.5cm |
┃해설┃
이 비는 반수 권재만의 선정비이다. 두천리
마을회관을 지나 우측 냇가 건너편 비각 안에
있는 2기의 철비 중 하나이다. 1890년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비좌관석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비의 보존상태는 양
호하다. 비신의 앞면 글씨를 양각으로 주조
하였다. 비석 머리의 반원 형태나 그 안의
문양 즉 반원과 7개의 작은 원은 모두 연화
문으로 볼 수 있다.
9. 관찰사 홍우순 청덕애휼 영세불망비(觀察使洪佑順淸德愛恤永世不忘碑)
┃원문┃
觀察使洪公佑順淸德愛恤永世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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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 크기|높이:117cm, 너비:33cm, 두께:3.5cm |
(관찰사 홍공우순 청덕애휼 영세불망비)
蠲革船稅 恤愛普◯ (견혁선세 휼애보○)
涸魚得水 恩成咸◯ (학어득수 은성함○)
壬子 十一月 日 津民等立
(임자 십일월 일 진민등립)
┃해석┃
선세의 폐단을 고쳐주시고
어부들을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셨네.
마른 물웅덩이의 물고기가 물을 얻은
듯하니 공의 은혜를 모두 칭송하네.
1852년(철종3년) 11월에 울진 어민들이 세움.
10. 현령 심해 유애선정비(縣令沈瑎遺愛善政碑)
┃원문┃
縣令沈公瑎遺愛善政碑(현령심공해유애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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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 크기|높이:117cm, 너비:33cm, 두께:3.5cm |
去後之思 久而彌切 (거후지사 구이미절)
雍正壬寅二月 日立 (옹정 임인 이월일 립)
同治庚午 十一月 日 改立 (동치 경오 십일월일 개립)
┃해석┃
떠나가신 뒤에 생각하며
오래될수록 더욱 간절하네.
1722년 2월 일에 세움.
1870년 11월에 다시 세움.
11. 현령 이용준 영세불망비(縣令李容準永世不忘碑)
┃원문┃
縣令李侯容準永世不忘碑(현령이후용준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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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8번지 크기|높이:99cm, 폭:29cm, 두께:3.5cm |
澤溢曁山 (택일기산)
痼積快革 (고적쾌혁)
永世曷諼 (영세갈훤)
鑄銅屹立 (주동흘입)
咸豊九年己未四月日(함풍 구년 기미 사월 일)
┃해석┃
은혜는 넘쳐 산에 이르고
고질과 적폐를 빠르게 고치셨네.
오래도록 잊지 못하여
철비를 우뚝 세운다네.
1859년 4월 세움.
Ⅳ. 마무리
조선시대 철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지방관직 수령의 공덕비이다. 경북의 철비도 대체로 관료의 공덕비이지만, 일부는 응와 이원조 선생의 철비처럼 흥학창선비의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울진의 내성 행상 철비 2기는 보부상의 공덕비인데, 지역민들이 그들의 은덕을 기리어 자발적으로 세운 철비라고 추정된다.
울진은 현존하는 철비가 4기인데, 울진의 인근 주요 철산지로 예천군, 영덕현, 예안현(안동), 용궁현(예천)을 꼽을 수 있으며, 이런 철광산의 민간 운영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여 세금을 내고 철을 직접 채취할 수 있었기에 보부상들의 주거래 품목 중 하나로 유추할 수 있다.
내륙과 물자를 잇는 상업자본이 사대부와 견주어 볼 정도로 성장하였고 그들은 울진에 철비를 세움으로써 스스로 위엄과 권위를 내세웠을 것으로 추론한다. 이러한 경우를 통하여 지방관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우월한 상민계층과 관직에 있는 양반이 아니라도 선정비도 철비로 입비(立碑) 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 우월성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세웠는지 덕을 베풀어 기리는 마음으로 백성들이 세웠는지 비의 조성 주체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형태로 보아 국가적 제약은 크지 않았다고 예측할 수 있다.
경북에 분포하고 있는 철비 가운데 비각 안에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4기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특성상 비와 바람의 자연적 환경요인에 노출된 철비는 현재도 부식이 진행되어 파손되고 있음을 조사 중 육안으로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울진봉평신라비기념관 앞에 서 있는 철비 2기는 산화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제대로 보존 처리를 하였다고 한다. 나머지 노출된 철비도 울진의 사례와 같이 금속 보존 처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박철상,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 계명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장오중, 「조선시대 비액(비액)의 서예미 연구」, 계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채광수, 「조선시대 善政碑 건립 과정과 시기별 추이: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2010.
끝. 다음 호에는 다른 내용이 이어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