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11. 임진왜란과 새재(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서기 1589년 중봉 조헌은 도끼를 등에 지고 대궐 앞에 나아가 왜적의 방비책으로 영남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 더욱이 문경새재의 경계를 강화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선조 25년(서기 1592년) 임진년 4월 도요토미(豐臣秀吉)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니 그 전란이 임진왜란이다. 왜병은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1진 1만8천7백명을 시작으로 2진 가등청정(加藤淸正)이 2만2천8백명, 3진 흑전장정(黑田長政)이 1만1천명, 4진 모리길성(毛利吉成)이 1만4천명, 5진 복도정칙(福島正則)이 2만5천명, 6진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1만5천명, 7진 모리원지(毛利元之)가 3만명, 8진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1만명, 9진 우시수승(羽柴秀勝)이 1만1천5백명, 이상의 육군 정예병 15만8천명과 그 외에 구귀가융(九鬼嘉隆)·등당고호(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 그 외에도 후방 경비병을 합하면 20만을 상회하는 대 병력이었다.
임진년 4월 14일 유시(酉時:오후5시경) 초(初) 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진이 700여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부산 앞바다를 온통 덮으며 끝도 없이 밀려오자 부산 가덕도 운봉 봉수대에서 적의 침공을 알리는 봉화가 피어오르면서 임진왜란은 시작이 되었다.
부산진의 첨사 정발이 절영도로 사냥을 나간 사이 왜병은 부산진을 습격하여 첨사가 돌아왔을 때에는 성은 함락 직전의 상황이었다. 첨사 정발은 부산진의 소속된 장졸들을 수습하여 왜적과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웠지만 왜적의 공격에서 성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 순국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헌도 군졸들을 규합하여 고군분투 하였으나 왜적의 대병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면서 역시 순국하였다.
왜적이 침입한지 3일째인 4월 17일에서야 경상좌수사 박홍이 올린 장계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박홍의 장계를 접한 조정에서는 그때서야 대책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충주, 새재, 상주로 향하는 중로를 지키게 하고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삼아 단양, 죽령 쪽을 그리고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 청주, 추풍령을 방어토록 하였다. 또한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 성응길을 도와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를 조방장으로 삼아 이일을 도와 새재를 지키도록 하여 왜적이 백두대간을 넘어 충청도 땅까지 침범하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우렸다.
명령을 받은 순변사 이일은 군사를 모집하려고 한양에서 3일을 머물렀으나, 병사들의 모집이 여의치를 못하여 별장 유옥으로 하여금 군병을 모집하여 뒤따라오게 하고, 약간의 군관만을 이끌고 새재를 넘어 상주로 갔다.
한편 경상감사 김수(金睟)는 제승방략의 분군법(分軍法)에 의하여 각 열읍에 공문을 보내 수령들이 소속된 군사들을 인솔하고 감영이 있는 대구로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각 고을의 수령들은 직접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집결지인 대구로 내려와 금호강변에서 임시 주둔하면서, 서울에서 내려오는 순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강가에 노숙하면서 순변사를 기다린 지 이미 수일이 되었으나 순변사는 도착하지 않고 적병들은 점점 가까이 오니 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그때 큰 비까지 내려 옷과 행장이 비에 다 젖고 지참했던 군량마저 떨어져 집결하였던 군사들은 야간을 틈타 하나 둘 대오를 이탈하기 시작하여 결국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솔자인 수령들도 어쩌지를 못하고 인솔해갔던 군사들을 모두 잃어버리고는 단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제승박략의 분군법에 의하여 각 열읍에서 차출된 병사들은 집결지인 금호강변에서 병력을 인솔할 순변사를 기다리다가 순변사가 도착하기 전에 적군을 먼저 맞이하게 되어 병사들은 왜적과는 대적 한번 못해본 체 완전히 와해(瓦解)되고 말았다.
서애 유성룡은 일찍이 제승방략의 분군법(分軍法)이 불가함을 주장하고 진군법(鎭軍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갑자기 변경함이 불가하다고 하여 유성룡의 건의는 보류되었다.
제승방략이란 장군들에 의한 지방 활거를 두려워 한 나머지 군사들을 각 고을마다 나누어 보유하고 국가에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각 고을의 군사들을 한곳으로 집결시키고 변란의 규모에 따라 순변사, 도순변사, 도원수 등을 임명하여 집결시킨 병사들을 인솔케 하여 변란을 평정하는 제도로써 임명을 받은 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적의 선봉이 먼저 닥치면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불안에 빠져 궤주를 면치 못하는 폐단을 들어 제승방략의 불가함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에 이에 좌병사 김성일의 장계와 경상감사 김수의 장계 등 그 외에도 하루에도 수차례의 장계가 빗발치듯 한 후에야 조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병조판서 김응남을 부사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신립이 도체찰사인 유성룡에게 “이일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앞에 나가 있는데 후원하는 군사가 없으니 이제 도체찰사가 비록 내려가더라도 싸우는 장수가 아니니 이때에 어찌하여 용맹한 장수를 시켜 이일을 돕게 하지 아니하오.”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선조께 아뢰어 신립에게 삼도순변사를 제수하고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삼아 신립을 도와 이일의 후속부대로 내려가게 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출전하는 신립을 친히 접견하고 전송하면서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이일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 하라. 종외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의 군기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하였다고 <선조실록 제26권 25년 임진 4월 병오조>에서 기록하고 있다.
다음편에 계속
이정록 프로필
안동대학교 인문대학 한문학과 졸업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회원(시, 수필)
국가기록원 문경시 민간기록 조사위원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문경문화원 근현대인물사 편집위원
경북향토사연구회 부회장 겸 편집국장
문경시사(聞慶市史) 편찬위원회 조사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