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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을 마지막 5개 봉수대(아차산·천림산·무악동·무악서·개화산 봉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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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봉수제도와칠곡 박집산 봉수대(1)
Ⅰ. 봉수란
봉수는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설치·운영되어 온 관방시설(關防施設)의 하나로 주연야화(晝燃夜火)의 신호체계를 이용해 변경(邊境)의 군사정보를 주변지역과 중앙에 신속히 알려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군사통신시스템이었다.(김주홍외, 한국의 봉수, 2003)
‘봉수대’ 글자를 한 자씩 살펴보면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봉(烽)은 봉화나 횃불을, 수(燧)도 봉화나 부싯돌을 가리킨다.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나 불을 피워 신호를 보낸다고 해서 ‘봉수’라고 불렀다. 그 일을 수행하던 자리가 바로 봉수대다. 불을 올릴 때는 봉화대가 되고 연기를 올릴 때는 봉수대가 되는데 연기를 올릴 경우라도 불을 피워야 하기에 봉화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통신수단으로 봉수대라 지칭한다.
이러한 봉수제는 우리나라 고유의 제도가 아닌 한국고대 삼국시대부터 발달된 중국의 봉수제를 받아들여 원시적인 형태로 활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나오는데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 왕이 왕후 허 씨를 맞아들일 때 신하를 시켜 망산도 앞바다에 나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면 불을 올려 통지하라는 내용이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온조왕 10년(서기 19년)에 봉현, 봉산, 봉산성이란 지명이 나타나 있어 이미 봉수제가 운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직접 봉수를 관장하며 점차 체계적인 봉수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큰 사변시 불거(不擧)에 따른 실제 효용여부가 논의되어 조선후기에는 파발제도와 병행하여 실시되다가 구한말 전보통신의 등장으로 전국의 모든 봉수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Ⅱ. 봉수의 종류
봉수는 노선에 따라 직봉과 간봉으로 구분되며, 성격에 따라 전국의 모든 봉수가 모이는 경봉수(京烽燧), 해안과 변경에 위치한 연변봉수(沿邊烽燧), 육지 내륙의 후방 산간지대에 위치하여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된다. 이외 조선후기 서양 이양선의 침입에 대비하거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연변지역의 읍(邑)·영(營)·진(鎭) 등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운용하였던 권설봉수(權設烽燧)가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봉수대는 부산 기장 남산봉수대로 알려져 있다. 봉수의 핵심시설인 연대가 높이 5m, 봉수대 외곽둘레는 220m나 됐다. 또 건물 터를 측량한 결과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봉수대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학계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부속건물 터 또한 기단부와 벽체, 초석, 온돌시설 등이 지금까지의 봉수대 발굴조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건물 터에서는 고려시대의 대표적 유물들인 생선뼈무늬인 어골문 기와와 청자가 발견돼, 봉수대 역사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남산(당시는 목멱산)봉수대는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점에 있는 봉수대다. 한양 도성에 바로 상황을 보고하는 최종 봉수대이기 때문이다. 왕에게 전국의 상황을 종합보고를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Ⅲ. 봉수 노선도
고대부터 조선까지 변방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달하는 군사 통신수단으로 대략 수십 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봉수대를 설치해 약정된 신호에 따라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적의 침입 사실을 알리는 장치다.
1908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 후기 5개의 직봉을 포함해 총 622개의 봉수가 운영됐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 봉수조에는 군현 간 주고받는 봉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세종실록’의 지리지 등과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서에는 전국 봉수망 경로도 나타나 있다. 직봉(直烽)이 전국 5로이고, 서울 목멱산(남산)에 도달한다. 현재 복원된 목멱산 봉수는 총 5개다.
세종은 또한 전국의 봉수 노선을 1로(路)에서 5로(路)로 나눴다. 봉수를 전달하는 봉수대는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약 643개에 달한다고 <증보문헌비고>에 기록하고 있다. 대개 전달방식은 국경의 변방에서부터 내륙을 거쳐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앙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국경지방으로 보내는 분산식도 있었다.
‘제2로 직봉’ 노선과 전남 여수 돌산도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제5로 직봉’은 남한에, 나머지 3개 직봉 노선은 북한에 있다. 직봉은 전국 봉수망을 연결하는 중요 봉화대, 간봉은 주요 간선로 사이에 있는 작은 봉수망이다. 조선시대 봉수대 5대 기간 선로는 다음 그림과 같이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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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전국 봉수지도(사진 증보문헌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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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로는 함경도 경흥 → 강원도 → 경기도 → 양주 아차산 봉수,
제2로는 동래 다대포 → 경상도 → 충청도 → 경기도 → 성남 천림산 봉수,
제3로는 평안도 강계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동봉수,
제4로는 평안도 의주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서봉수,
제5로는 전남 순천 → 충청도 → 경기도 → 서울 개화산 봉수 등으로 나눠졌다.
이렇게 나눠진 봉수는 최종적으로 한양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봉수대로 집결되어 그 상황이 즉시 조정에 보고되었다. 제1로·3로·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제2로·5로는 왜족의 침입을 경계하여 대비한 루트였던 셈이다.
첫 발화지점에서 한양까지 봉수가 도달하는 데는 대략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 동래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20일 정도 걸렸던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히 빠른 전달인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 봉수대가 643개였다면 선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개 선로에 평균 130개가량 된다. 제 2로인 다대포에서 성남 천림산 봉수까지 거리가 400km 정도 된다면 약 3km마다 봉수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