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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전적기념비와 돌탑(적석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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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임란의병奉化壬亂義兵의 활동과 봉화군민의 적성봉積石峯을 통한 추모(1)
최종화
Ⅰ. 들어가며
오늘날 우리가 겪었던 6.25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에서의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그려보면서 400여 년 전 우리나라가 겪었던 임진왜란을 비추어 본다. 당시의 우리 조선은 엄혹한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軍官民의 총체적 노력 가운데 義兵軍이 있었음을 되새겨 본다. 왜란 초기 준비 없는 대비로 연전연패하는 패전의 아픔이 이어졌지만 이순신 장군의 승전과 지방의 의병들과 승병이 궐기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변하면서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 시킨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본고에서는 왜란의 槪要을 알아보고 지방에서 궐기한 의병의 전국적인 노력을 살펴보면서 奉化壬亂義兵 활동이 경북 북부지방의 왜병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의병 추모를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과 해방 후 봉화군민들이 당시의 의병 활동으로 전사한 분들의 위령제를 올리기 위한 소박한 노력의 일환인 돌탑(積石奉) 쌓기와 충렬사를 건립한 내력과 현재의 위령제 시행을 소개하고자 한다.
Ⅱ. 임진왜란
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각성과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민족의 운명을 새로 개척해 나간 계기가 된 전쟁이다.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거족적인 저항과, 이순신에 의한 制海權의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 시킨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 戰亂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명(明)과 청(淸)이 교체되고 일본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Ⅲ. 의병 활동의 전개
1. 의병 활동 정의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制勝方略에 의해 조정에서 보낸 장수가 지방에서 農民兵인 正兵을 집결시켜 지휘하면 그게 官軍이고, 그 장수가 없을 때 싸워야 할 의무는 없음에도 지방 유력자가 정병들을 모집해 지휘하면 그것이 의병이다.
이렇듯, 초기 의병들은 조정의 기능이 마비되자 전국 곳곳에서 자발적인 봉기가 일어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중후기로 나아가서는 조정에 의해 공식적인 의병 조직으로서 인정받는다.
물론 의병 중에는 병역 의무가 없는 천민(賤民)이나 양반들이 지원한 경우도 많았으나 기본적으로는 군사훈련을 조금이라도 받아본 적 있는 正兵 출신 의병들이 당연히 더 많았다. 그나마 1593년 기준으로 의병의 수는 22,600명으로 관군의 4분의 1 정도였다.
이들 義兵은 전쟁 초반이라면 모를까, 전열이 정비된 이후부터는 독자행동을 하지 않고 조선 조정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다. 조선군은 이를 기반으로 지원 온 명군과 합세하여 이미 1593년이면 일본군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며 그들을 남부 해안 지역으로 도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의병으로 함경도(길주)의 정문부, 강원도(유점사) 사명대사, 경남 (합천)의 정인홍, 전라도(금산) 조헌, 영규, 평안도(묘향산) 서산대사(휴정), 황해도(연안) 이정암을 들 수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의병의 숫자는 점차 감소 추세에 접어드는데, 임진년 이후에 발생한 계사-갑오년 기근으로 義兵軍 유지가 어려워진 점, 의병들의 관군 편입, 조정에서 의병들을 물자 운송에 동원했던 일 등이 영향을 미쳤다.
2. 의병활동에서 나타난 문제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병력은 관군이 주전력이었고 의병은 보조군으로 활동하였다. 전쟁으로 생긴 혼란 시 의병을 사칭하면서 재물을 약탈하던 자들이 관군에게 토벌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공권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군대는 개인 사병이나 반란군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에 조선 조정과 관군이 이들을 경계했다고 한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