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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울릉군 농업기술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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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 칡소(3)
이경애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울릉)
Ⅵ. 울릉 한우의 시작
신라시대 우산국의 영토였던 울릉도에서는 신라 토기와 함께 소의 협골(脇骨)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과거부터 소의 사육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관련 기록이나 발굴이 없었기에 정확한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1882년의 개척령의 반포후 1883년부터 본격적 이주 시작, 이주민 16호 54명이 울릉도로 입도하였으며 이주 당시 정부의 지원으로 식량이나 곡식의 종자 등과 함께 도입된 소 자웅 1쌍이 근대 울릉도 한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지속적인 인구 유입과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에 따른 일본인의 유입 등으로 울릉도의 인구는 증가하였으며 어업과 함께 축산업이 점차 발전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울릉도에서의 소 사육은 매우 활발하였다. 1924년 당시 농가의 대부분이 소를 키워 1,253호가 1,167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식용을 위해서였다. 울릉도의 소는 육질이 부드러운데도 상등육이 100문(匁)에 20전(錢)에 불과할 정도로 저렴했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와 산양, 닭도 사육했다.
해방 이후 소의 사육은 울릉도민들의 주요한 생업 수단 중 하나였다. 밭 농업이 정착되어 가고 오징어 어업 등의 발전으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소의 사육 역시 활발하였다. 일반적으로 농가마다 두세 마리 정도를 사육하였으며 자체 소비하거나 가게에서 도축하여 식당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다만 현재의 울릉도와 같이 관광객이 많지 않았기에 자체 소비와 식당으로 판매 이외에는 마을이나 지역단위에 형성되었던 우시장을 통해 유통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우시장은 도동과 태하가 있었으며 현재도 태하에는 옛 우물이나 소를 매어 놓았던 기둥이 남아있는 우시장 터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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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하 옛 우시장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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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의 경우 작은 집과 우물을 마련해 두고 소규모의 도축을 위주로 했고, 태하는 거래를 주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현대화된 도축장이 있지만 과거에는 바닷가나 개울가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 도끼로 소를 도축하거나, 사육하는 사람이 직접 소를 도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60~70년대 소의 유통은, 육지의 상인들이 울릉도까지 배를 타고 소를 사러 와 장이 서면 소를 거래하고, 팔린 소는 배에 실어 육지로 가져갔다. 해마다. 100~200마리 정도의 소가 낙찰을 통해 거래되었다.
울릉도 소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는 울릉도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인구 증가가 시작된 1950년대부터는 밭 농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울릉도 밭 농업의 특징으로 개간지가 집약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 산림과 공존하는 조각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급경사지에 있는 밭의 흙이 떠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고 산림에서 생산된 유기물이 공급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으로, 밭 둘레에 두둑을 만들고 억새를 심거나 산림을 남겨놓는 등의 띠녹지를 형성한 것도 토양 유실을 방지하는 작용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급경사 지형이 물 공급이 어려웠는데, 지형이 가팔라 하천이 발달할 수 없는 대신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바다가 만나 해무가 되면서 농지에 그늘을 형성하고 수분을 공급하게 된 것이다.
울릉도 개척령을 통해 들어온 이주민들은 화전을 통해 경작지를 개간했지만 계속 화전을 통해 땅의 비옥도를 유지할 수는 없었는데, 이때 퇴비의 재료로 각 농가 축사에서 나온 분뇨였다. 울릉도 특산물인 약소와 울릉도 밭 농업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소의 배설물을 잘 삭혀 밭의 거름으로 쓰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기피 물질로 분류되는 소의 배설물도 이곳에서는 자연과 함께 순환하는 농업 자원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먹기에는 억세고 크게 자란 산채들은 잘 말려서 소에게 여물로 주는 것도 생태계의 순환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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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릉 약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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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자란 한우를 특별히 ‘약소’라고 일컫는 것도 이 산채를 먹잇감으로 삼는 데에서 나왔으며, 산마늘과 섬말나리 같은 다양한 산채들을 먹고 자라서 한층 몸에 좋은 약성을 지닌 것을 인정받아 울릉도 특산물로 자리 잡은 것이다.
Ⅶ. 천궁산업의 증가와 한우산업의 위기
1970년대까지는 울릉도에 수익 창출을 위한 작물이 없었다. 대부분 수익보다는 자체 소비를 위한 식량 재배의 성격이 강했으며, 울릉도의 환경적 특성상 옥수수, 감자, 보리 등의 재배가 주를 이루었고 벼농사는 일부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울릉도에서 천궁이 높은 수익을 내게 되자 천궁재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천궁재배는 10년 정도밖에 유지되지 못하였다. 점차 울릉도 외 육지에서도 천궁재배가 성공하고 품종의 사양화가 진행되었으며, 값싼 중국산 천궁이 본격적으로 수입됨에 따라 천궁 산업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천궁산업의 쇠퇴는 단순한 종사자의 손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후유증을 남겼다. 농사는 지력(地力)의 보존과 병행되어야 하지만 천궁재배에 집중함에 따라 거름주기를 소홀히 하였으며 다량의 농약 살포에 토양의 산성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기존의 천궁재배를 위해서는 땅을 더 깊이 갈아주거나 거름을 주어야만 하는 등 지력 회복을 위한 비용 역시 증대되었다.
천궁재배로 농지가 산성화되어 다른 작물 재배도 어려워지자 다시 소를 사육하고자 하는 주민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울릉군은 농가에 송아지를 빌려주고 3년 후 송아지를 돌려받는 대부 사업을 진행, 울릉도의 축산업을 다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대부 사업이란 재정 부담으로 인해 자비로 소를 구입 못 하는 사육 농가에 암송아지를 빌려주고 3년 후 성장한 암송아지가 출산하면 빌린 암송아지를 군에 다시 반납하는 것이다. 송아지의 대여는 무상으로 하는 농가 지원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지원사업 진행으로 소 사육두수는 800두에 도달하였고 소 사육 농가들의 수익이 점차 안정화되어 갈 수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