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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뜰 책 이야기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월스트리트 이야기

조진향 기자 입력 2026.01.18 19:15 수정 2026.01.18 19:15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지음, 이삼출 옮김, 민음사.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처음에 바틀비 군은 엄청난 양의 필사를 해냈습니다. 필사에 오랫동안 굶주렸던 듯 서류들을 마구마구 집어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소화를 위한 휴식 같은 것은 없었죠. 바틀비 군은 주야간 연속으로 근무했으므로, 햇빛 아래에서도 필사하고 촛불 아래에서도 필사를 계속했습니다 바틀비 군이 열심히 필사하면서도 쾌활했다면 전 바틀비 군을 고용하기를 아주 잘했다고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바틀비 군은 필사 작업을 하는 내내 말이 없었고, 창백했으며, 기계적이었습니다. 자신이 필사한 복사본의 정확도를 토씨 하나까지 철저히 확인하는 것을 필경사에게 필수적인 의무죠. 사무실에 필경사가 둘이나 그 이상이 근무한다면 서로가 사로의 필사본을 검토하는 걸 도와줍니다. 한 명이 필사본을 읽으면, 다른 한 명이 원본을 들고 확인하는 식입니다. 아주 단조롭고 피곤하며, 지루한 과정이죠. 성격이 괄괄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작업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저와 함께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을 겁니다. 바틀비 군의 필사본을 검토할 필요가 방생하기 전이었지요. 제가 담당하고 있던 작은 서류를 급하게 마감해야 해서 갑자기 비틀비 군을 불렀습니다. 제가 급하기도 했고 또 당연히 즉각적인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저는 머리를 숙여 책상 위 원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필사본을 든 오른손을 옆쪽으로 홱 내뻗었지요. 바틀비 군이 자기가 있던 구석에서 나오면 바로 건네받아 즉시 대조를 시작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바로 이 자세로 바틀비 군을 불러내면서 저는 이유를 재빨리 설명했습니다. 저와 함께 짧은 서류 하나를 검토하자고 했던 겁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얼마나 경악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바틀비 군이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채 유난히 차분하고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던 것입니다.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
 저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바틀비 군을 쳐다보았습니다. 바틀비 군은 필사를 계속 이어갔고, 저는 제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일세. 전 생각했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지만 하던 일을 마저 끝마쳐야 했습니다. 당분간 그 일은 잊어버리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결론지었죠. 그래서 다른 방에 있던 니퍼 군을 불러서 서류를 급하게 마감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났을 때, 바틀비 군이 네 건의 아주 긴 서류를 필사하는 작업을 끝마쳤습니다. 저의 형평법원에서 제 면전에서 행해진 증언의 일주일 치 기록을 네 부의 필사본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검토가 필요했죠. 아주 중요한 문건이었으므로 최대한 정확해야 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저는 터키 씨와 니퍼 군, 그리고 진저 넛을 제 방으로 불렀습니다. 네 명의 직원에게 각각 한 부씩 맡길 생각이었지요. 원본은 제가 읽을 예정이었습니다. 당연히 터키 씨와 니퍼 군과 진저 넛은 필사본을 손에 들고 나란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저는 이 유별난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도록 바틀비 군을 불렀습니다.
“바틀비 군! 뻘리! 내가 기다리고 있어요.”
양탄자가 깔리지 않은 맨바닥 위로 천천히 의자 다리가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고는 곧 바틀비 군의 모습을 드러내 자신의 은신처 입구에 섰습니다.
“필요한 게 무엇인지요?” 차분하게 물었습니다.
“필사본들, 필사본” 제가 급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지금 검토할 거야. 자 여깄네.” 저는 네 번째 필사본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바틀비 군은 칸막이 너머로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거부하는 이유가 뭔가?”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중략)
뭐든 좋으니 자네 자신에 관해 말해 주겠나?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대답하지 않는 편이 전 좋습니다. 이 말과 함께 바틀비 군은 자신의 은신처로 물러갔습니다.
(중략)
왜 필사 작업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이제 필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답했습니다.
왜, 지금은 어째서? 다음엔 또 뭘? 전 고함을 질렀습니다. 필사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더 이상 안 합니다.
그럼 이유가 뭐지?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나 보군요. 무심한 말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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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 스트리트에 사무실을 둔 변호사인 화자는 '바틀비'라는 청년을 필경사로 고용합니다. 어느 날 필사한 서류를 검토하자는 변호사의 요청에 바틀비는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결국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쫓겨나지만 사무실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필경도 거부하고, 자료의 검토도 거부합니다. 

이 소설은 1853년에 월간 퍼트넘에 발표된 '필경사 바틀비'라는 허먼 멜빌의 대표적 소설입니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바틀비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참 맹랑하다고 해야할 지, 버릇이 없다고 해야할 지, 어쨌든 상관의 요구나 명령에 불응하는 바틀비라는 인물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가 묻는 대체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도 "지금으로서는 대답하지 앟는 편이 전 좋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결국 변호사는 폭발하고 바틀비를 해고하기에 이르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라는 말을 회사에 다니면서 수십 번도 더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직장에서 상사의 요청과 요구에 위계 질서, 고용의 댓가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상사의 지시에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때, 꿋꿋하게 자신의 일만을 고집하면서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바틀비와 같은 용기가 없었다는 걸 시인합니다. 

이 글은 철저히 고용주, 갑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라 바틀비가 왜 그런 대답을 했고, 그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해명은 알 수 없습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나 자질보다는 일의 성과에 매몰되어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갑 즉, 고용주는 부당하거나 자질구레한 요구를 - 그것이 업무의 영역이 아니라도 - 마음대로 요구합니다. 고용인은 고용주의 눈치를 보며 거부하지 못하고 불편해하면서 따르는 거지요. 그렇다면 바틀비는 정말 당당하고 프로다운 필경사였네요.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구 좀 불러 달라거나 커피를 타오라거나 복사를 대신해 달라는 지시를 받으면 짜증이 났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그것을 당당하게 거부한 바틀비의 모습이 한편 시원합니다. "필경을 거부한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나 보군요."라며 무심히 말하는 바틀비의 모습에서 정직하고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에 어긋난다면 설령 불리하더라도 거부하는 바틀비의 소신이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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