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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하집 권7(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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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토성 예천임씨(2)
조윤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예천)
Ⅲ. 한림학사 이지명과 임춘
이지명과는 동시대 무신정권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활동한 기간은 서하가 18세 때인 1167년부터 이지명이 죽은 1191년으로 본다면 24년 정도가 된다. 서하는 1150(?)∼1196년이고 이지명은 1127∼1191년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3살이다.
서하는 당대 권세가인 이지명에게 1181년에 관직 등용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고, 1190년에는 장단에 유허지 장만을 부탁하여 이지명이 초당을 마련해 주어서 그곳으로 이거한 사례 등으로 보아 사승(師承)의 관계보다는 부형의 사이로 보이는 예를 갖추며 종사(宗師)로 우러른 선망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하의 백부나 종숙 등 친인척이 그 이전 시대까지만 해도 중앙관계에서 있었던 터라 양인은 그로 인해 인연이 맺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서하가 망설이며 청을 한 어려운 부탁을 이지명은 흔쾌히 들어주지 않은 듯하다. 서하가 가난의 굴레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종신토록 곤궁한 생활을 하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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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명과 임춘의 이력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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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서하가 이지명에게 보낸 서찰
서하가 이지명에게 보낸 서찰은 문집 상권에 8회 나온다. 과거시험에 낙방한 처지, 문권을 버리고 강동으로 가려한 일, 10년 고학에 오랫동안 묻기를 기다린 일, 관료로 등용하고자 천거를 부탁한 일, 장단에 유허지 하나 부탁한 일, 이지명의 도움으로 장단에 초당을 마련한 일 등이다.
이러한 수차의 요청에 이지명은 장단에 집 한 채 마련해 주는 도움을 줬을 뿐 일자리는 끝내 봐주지 않았다. 실의에 찬 서하는 유락생활을 하면서 초췌한 자신의 처지를 이지명에게 알리고 구원을 청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1174년 여름 가솔하여 강남의 추풍령 넘어 상주 묘향과 예천 지과실로 전전하였다. 당시 자신의 회한을 「장검행( 劒行) 시 한 수에 토로하였다.
〇 1168년(의종22) 19세, 3월에 처음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다.
<次韻李相國知命 見贈長句二首> 한번의 낙방으로 학업을 외면하지 않고 육적에 전력하기를 술에 취하여...
〇 1170년(의종24) 21세, <次韻李相國知命 見贈長句二首> 문권을 버리고 강동으로 가려 하다가 배회한 끝에 다시 주문을 찾아
〇 1174년(명종4) 25세, 갑오년 여름 강남으로 피신하였는데(이때 김보당의 사건으로 가족을 이끌고 강남으로 피신하였다), 유랑하는 탄식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단가를 짓고 「장검행(杖劒行)」이라 하였다.
높은 베개 베고 5년을 살았는데. 高枕臥五載
늘 굶주려서 얼굴이 검게 변했으나 恒飢已變顔色黧
천권의 책으로 메마른 창자를 달래었네. 牢落枯腸千卷書
정강이뼈만 따뜻하면 만족하고 及骭亦足溫
배만 부르면 남은 願은 없어라. 滿腹不願餘
가소롭다 문장 해 봐야 맞돈 한 푼 못 받는데 可笑文章不直錢
만승천자(萬乘天子)가 어찌 자허부(子虛賦)를 읽었다던가? 萬乘何會讀子虛
서하는 남향 중 예천 지과리 희문당(喜聞堂)에 은거하고 또 상주 개령 묘향에서 5여 년을 생활하였다.
〇 1180년경(명종10) 상 형부이시랑 서 上 刑部李侍郞書
몸은 쇠잔하고 집은 패하여 굶주린 식구들이 추위와 궁색에 쫒기어 강동으로 가서 걸식생활을 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주머니는 고갈되고 나약한 아내와 과부가 된 누이는 쑥대처럼 휘날리고 부평초(浮萍草)처럼 단절되어...나로 하여금 다시 보잘것없는 옛땅을 얻게 한다면 전가족 열 식구가 아침에는 춥고 굶주렸으나 저녁에는 배부르고 따뜻하게 된다면 모두 각하의 난로(煖爐) 가운데 조화로 여기겠습니다. 알 수없습니다만 봄을 주시겠습니까? 존엄을 모독하여 두려워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두 번 절하옵니다.
〇 1181년(명종11) 32세,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정3품) 이지명에게 천거를 부탁하다.
〇 1182년(명종12) 33세, 이지명이 우산기상시로서 과거를 주관하다.
〇 1184년(명종14) 35세, 상 이학사 서 上李學士書
한때 많은 선비들이 종사(宗師)로 우러러 받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나는 항상 옷을 걷어 부치고 스승을 따라 제자의 예를 행하여 문하의 어진 사대부와 교류한 후에 물러나서 문(文)을 연구하려고 하였습니다...제가 지은 <일재기逸齋記>를 삼가 써서 드리오니 글자마다 포폄(褒貶: 칭찬과 나무람)을 주신다면 종신토록 다행함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올립니다.
〇 1184년(명종14) 35세, 상 이학사지명 서 上李學士知命書
임춘은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이 관(官)의 뜨락에 글월 올립니다. 저는 지금 쓸쓸한 고을 싸늘한 골짜기에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가끔 원통한 기운이 사무쳐....천하의 선비들이 채용되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선비들을 발굴하여 명검(名劍)을 발견하여 때를 씻고 빛을 갈아내면 첫날에 그 자질이 드러나고...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임모(林某)는 재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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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하 임춘의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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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서하집(西河集)』
서하집의 발견은 청도 운문사(雲文寺)에 승려 ‘담인(澹印)’이 비장(秘藏)한 문집을 1713년 승려 인담(印澹)이 꿈에 계시를 받고, 약야계(若耶溪) 석벽에 묻힌 것을 발굴했다. 구리항아리 속에 서하집 1질과 면경, 옥구슬이 들어 있었다. 고려 때 승려 담인이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서하집은 1222년 이인로가 처음 간행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인로의 서문과 최우의 발문이 1714년 임재무가 간행한 서하집에 등재되어 있다. 이후 1865,1957년 간행되고 국역은 1984년 중앙대 사학과 진성규교수가 번역 간행하였다. <2024.8. 胤>
이상으로 예천의 토성, 예천임씨의 연재를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