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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인 구자명 소설가(사진 여환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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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기 칠곡호국평화대학이 11월 6일 개강한 가운데 11월 13일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세미나실에서 두 번째 시간으로 구자명 소설가가 ‘두 거장의 만남, 구상과 이중섭’을 강의했다.
구자명 소설가는 아버지 구상 시인과 절친이던 이중섭 화가와의 만남과 우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중섭 화가를 직접 만난 적은 없고, 태어났을 때는 그가 돌아가신 지 1년 후였다고 한다. 집안에서 직접 들은 몇몇 이야기들과 구상 시인의 산문, 신문 자료, 문인들의 저서를 통해 선친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었고,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에 대해 공부하게 되어 영광스럽고, 고향분들을 청중으로 만나 마음이 따뜻하고 반갑다고 했다.
올해 9월 6일 서울 여의나루역 2번 출구 앞에 구상 시인길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이 있었다며 이번 강의를 계기로 구상 시인이 문인일뿐 아니라 사회인으로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그리고 이중섭 화가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래는 구자명 소설가가 이야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구상 시인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나 4살 때 베네딕도 수도원이 확장하면서 함경도 원산 인근 덕원으로 이전할 때 아버지(구종진)가 교육부분을 맡아 솔가하면서 같이 따라 갔다. 덕원에 수도원 중심의 마을이 조성되었고, 아버지는 해성소학교를 설립해 원장을 지냈으며,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중등부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중퇴하고 혜화동 동성상고(현 동성중고)에 진학했으나 결국 중퇴했다. 신학의 길을 포기하고 원산 덕원으로 돌아와 문학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일본으로 밀항해서 부두 노동자로 생활하며 니혼대 종교학교에 입학하여 불교학을 배웠다.
일본 유학 중 문인과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중섭 화가와의 첫만남도 이때였다. 구상 시인은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졸합한 후 해방직전 원산으로 돌아와 북선매일신보에 입사했고, 부인 서영옥 여사와 만나 결혼하며 문학계 활동을 해왔다. 당시 북한은 공산세력이 자리 잡았고, 1946년 경 뜻있는 문인들이 기획한 <응향>에 실린 구상 시인의 ‘여명도’, ‘길’ 등이 공산당 당국에 문제시되어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1947년 2월 홀로 남하하여 서울에 도착한 구상 시인은 남한 문인들과 교유하며 연합신문 기자로 취업하였다. 필화사건으로 월남한 그를 김동리, 최태응 등 동료 문인들이 적극 옹호하여 초기 서울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20세부터 각혈하고 폐결핵에 걸려 어려운 상황에서 동료 문인들이 성금을 거둬 도와 주웠다. 부인인 서영옥 여사는 수 개월 뒤 월남하여 마산성모병원에 취업하여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구상 시인은 승리일보 주간을 맡아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냉철하게 보도하였고,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전쟁시 ‘적군 묘지 앞에서’는 한민족의 동족상잔의 비극과 회환을 노래한 시이다.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종군기자로 생활했지만 이북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오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 경산 고모역에 가면 구상 시인이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고모역’이라는 시비가 있다. 북한에 있던 형님인 구대준 신부는 공산당에서 납치되어 돌아가셨다고 전해진다. 피난 예술인들은 대구에 많이 모여 하루하루 살아갔다. 대구 향촌동에는 어렵게 살아간 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상 시인은 전쟁이 끝난 후 영남일보 주필로 옮겨 활동했으며, 앞서 승리일보 주간으로 활약하면서 군 관계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개방적이며 박애정신을 가지고 있던 구상 시인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많은 예술인들을 도왔으며, 수많은 예술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꿰고 있었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폭넓은 애정과 교유는 그런 생각의 연장선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이중섭 화가와의 인연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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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명 소설가(사진 여환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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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가는 동경 유학 시절 구상 시인과 만나 평생의 절친으로 인연을 이어갔다. 이중섭 화가는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북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 문화학원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루오의 예수상과 닮았다며 감격하였고 첫만남부터 좋아했다고 한다. 1945년 마사코와 결혼한 이중섭 화가는 원산여자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부임했으나 3주 후 뛰쳐나왔다.
일화 가운데 이중섭 화가의 첫아들이 해방 이듬해 팔삭둥이로 태어났으나 곧 죽었다고 한다. 아이를 관 속에 넣고 술집에 가서 두 사람이 술을 퍼마시고 집에 돌아와 잠들었는데 새벽에 이중섭 화가가 일어나 그림을 그려 아이 관에 넣어주었다고 했다. 그림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면인데 아이가 혼자 외로울까봐 넣어주는 거라며 웃더라고 했다.
그후 응향의 표지그림을 그려주었다가 필화사건으로 구상 시인이 월남하자 이중섭 화가도 남쪽으로 내려와 구상 시인을 찾았다. 남한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중섭 화가는 구상 시인의 도움으로 근근히 생활할 수 있었다. 결국 이중섭 화가는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제주도 서귀포에서 아내와 아들 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생계유지가 어려워지자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일본으로 떠났고, 한일수교 전까지 외교문제로 가족들이 만날 수 없는 생이별을 겪었다. 정이 많고 순수하며 부인과 아이들을 사랑했던 이중섭 화가는, 가족을 그리며 하루하루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홀로 남아 가족을 그리며 작은 조각에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그린 그림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외롭고 단절된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던 이중섭 화가를 위해 구상 시인이 일본 밀항을 주선해 주었지만 이중섭 화가는 곧 돌아왔다고 한다.
1955년 영남일보에서 근무하던 구상 시인은 미국공보관 전시실에서 이중섭 화가의 개인전을 기획하였고, 이때 왜관에 있는 구상 시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최태응 소설가가 부인이 돌아가시고 소설가 마저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하면서 아이들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구상 시인은 그 딸아이(최영철)를 왜관 집으로 데려와 돌보았다고 한다. 이때 이 화백은 ‘구상네 가족’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화가였던 이 화백은, 그림도구가 없어서 노상 담배 은박지나 종이조각에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불쏘시개로 쓰이거나 함부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진가를 알아본 미국공보관 직원이 은지화와 소 그림을 사서 미국으로 가져갔고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중섭 화가는 전시회의 실패로 실의에 빠졌고 행려자로 떠돌다가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구상 시인이 찾아서 병원에 입원시켰지만 1956년 9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외로운 임종을 맞았다. 그의 묘소가 망우리에 있다.
이중섭 화가가 무명 작가에서 국민 화가가 된 것은 구상 시인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제주도 서귀포에 가면 ‘이중섭 거리’가 조성되어 있고, ‘이중섭 미술상’ 제정에도 힘을 실어준 이가 구상 시인이다. 구상 시인은 가지고 있던 이 화백의 자료를 제주도에 있는 이중섭기념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서귀포시에 갔다가 이중섭화가가 신세지던 집에 걸려 있던 ‘서귀포의 환상’(30호)이란 그림을 구해서 소장하고 있다가 1980년대 초 호암미술관에 넘기면서 받은 1억원을 수도원 사제양성 기금으로 헌납했다고 한다.
1956년 말 출간된 구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초토의시> 표지화는 이중섭 화가가 그려준 것이었고, 시집 후기에 그를 추모하는 글이 실렸다. 구상 시인은 예술에 치명(순교의 의미)한 화가를 통해 영혼의 동질성을 보았고,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가 많은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순수하고 계산되지 않은 유일한 관계는 이중섭 화가와의 우정이 아니었을까.
구상 시인은 2004년 건강이 악화되어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기 전, 가족보다 이중섭 화가를 먼저 찾았다고 한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 무구함을 지녔던 이중섭 화가를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했다고 한다.
구자명 소설가는 “서로 경쟁하고 이해관계를 따져 만나고, 서로 외로워하면서도 우정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요즘, 칠곡군 왜관읍 순심여고와 구상문학관 부근 도로가 구상·이중섭 우정의 거리로 조성되어 두 사람의 우정을 기념하고 있다.”며 “이 우정이야말로 인간적이고 다시 살려내야 할 중요한 문화사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척박하고 각박한 시대에 우정의 거리가 선한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예전 이중섭 화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왜관 구상 시인댁에 머물던 시절을 기억하는 지역에 사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맨발에 다 떨어진 군복을 입고 있던 이중섭 화가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시인의 집은 옆집과 나무 판자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기억한다며 그때 그린 그림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구자명 소설가는 1957년 경북 왜관에서 태어났다. 구상 시인의 따님으로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이며, 1997년 <작가세계>에 ‘뿔’로 등단한 이후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중견작가이다. 단편 ‘영혼의 그림자’, ‘아지와 홍콩’, ‘붙박여 있는 사람’, ‘지도는 길을 모른다’, 소설집 ‘건달’ 등이 있으며, 올해 미니픽션(짧은 소설)을 모은 작품집 ‘진눈깨비’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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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앞에선 구자명 소설가(사진 여환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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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11기 칠곡호국평화대학은 ‘Peace Bridge 칠곡, 평화를 잇다’를 주제로 11월 6일부터 12월 11일까지 매주 수요일 14시부터 16시까지 6회에 걸쳐 열리며, 강의교재는 무료이고, 4회 이상 출석시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