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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차 황오 초상(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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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풍월 시인風月詩人,녹차 황오綠此黃五(1)
Ⅰ. 머리말
녹차 황오는 『상산지(商山誌)』에 「시로서 당대에 유명한 인물」, 『별건곤』에는 「풍월의 시인」으로 황오와 김병연을 꽂을 만큼 그 시대에 유랑 시인으로 유명세가 있었던 인물이다. 30여 년을 한양과 양주에서 당시의 권문세가(權門勢家)와 교유하면서 시인과 구사객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시의 성격과 시의 내용 중에서 적극적인 구사 내용의 표현 내용이 있어 일제강점기까지는 유명 인물로 분류되었으나 해방 이후 점차 그의 구사객 활동에 대한 문제로 정상적인 시인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최근 이 시인에 관한 연구와 논문이 다수 나옴으로써 녹차의 시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인물적인 측면은 ①실의의 구사객(이숙희), ②유랑 지식인적 자화상, 체제에 수용되지 못한 잉여 지식인(이성혜), ③일정한 경제적 기반 없이 매면 서식하는 것(정순우), ④사대부의 지식과 전혀 다른 인간 유형으로 양반, 중간계급, 민중 속에서 분화되어 나온 인물(진재교)의 기존 연구에서 인물을 평가하고 있다.
또한, 문학적인 측면은 시(詩) 전체에 대하여 회화적이나 평면적, 음악적이나 소리만이 아닌 추상적 조형을 이루어낸 솜씨로써 ‘추상적 회화미(抽象的 繪畵美)’(이숙희)라고 평가하는 등 인물과 문학 분야 모두 연구자마다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시의 성격이 일반의 시와 다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상주에서는 이 시기 이전에도 읍권(邑權)을 주도했던 전형적인 향리 가문인 월성이씨(月城李氏)는 자신의 신분 옹호를 위해 4대에 걸쳐 진행되기도 했다.
향리 이진흥(李震興)은 고려와 조선시대 전국 향리를 대상으로 각종 읍지를 참고하여 향리의 기원, 형성, 치적을 기술한 연조귀감(掾曹龜鑑)을 1777년 편찬하고, 증손 대에 가서 1848년 이명구(李明九, 1799~1874)가 간행했다.
이명구는 유학자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가 예조판서 신석우(申錫愚, 1805~1865)의 문객이 되었다. 또한 홍직필(洪直弼, 1776~1852) 등 당대의 학자들과도 교유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교유 관계는 상주에서 세 번씩이나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무산되었고, 교유 관계로 맺어진 인물이 자신을 관직에 천거해 주리라는 기대와 이 책의 발간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유 관계에 있던 신석우 등이 졸하고, 의탁할 곳을 잃어 실패하자 1867년 낙향했으며, 그 후 1872년에는 군현 이서(吏胥)의 과거 응시 금지 조치까지 내려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864년 녹차의 낙향 시기와도 같은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이런 유형으로 관직을 얻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향리 가문인 이명구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이글에서는 시를 통해 교유 관계를 형성했던 녹차의 여러 연구물을 살펴보고, 상주 지방에서의 주요 활동 사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중모현 입향과 연보
장수황씨의 상주 입향조는 방촌 황희의 둘째 아들인 황보신(黃保身, 1401~1456)이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상주 중모현(中牟縣)의 백화산 아래 천하촌(川下村)에 자리를 잡았다. 천하촌은 현재의 모동면 수봉리의 옥동서원이 있는 옥동마을로 추측된다.
1456년(세조2) 선조를 배알하고, 형제들과 회동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졸했다. 사후에 한성 소윤(漢城少尹)에 증직되어 후손들은 장수황씨 소윤공파의 파조로 삼았다.
황보신이 중모현에 자리를 잡게 된 연유는 조선 전기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과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의 관습과 관련이 있다. 황보신의 처는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한 남양홍씨 홍여강(洪汝剛)의 딸이다.
그 당시 상주의 대표적인 토성은 상산김씨로서 상주에서 재지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김씨 중에서도 김지연(金之衍)→김원리(金元理, 典工判書)→김거도(金居道)로 이어지면서 크게 가계가 번성하였다.
김거도의 장녀가 남양홍씨 홍여강과 결혼하면서 상산김씨의 재지 기반이 남양홍씨 가문으로 전해지게 된다. 또한, 홍여강의 딸과 황보신이 결혼하면서 남양홍씨의 재지 기반이 장수황씨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황오의 초명은 천로(天老), 이로(里老), 자는 사언(四彦), 사연(四衍), 자호는 녹차거사(綠此居士), 다른 호는 한안(漢案), 또 다른 호는 동해초이(東海樵夷)이다. 사진은 전해지지 않으며, 시집의 화상찬(畵像贊) 인상(人相)에 따라 초상을 추측해 보면 그림의 초상(추정)과 같다.
1816년(순조 16) 7월 21일 외가(外家)인 지리산 두류봉(頭流峯) 아래 경남 함양군(咸陽郡) 방장산(方丈山) 공배리(功倍里)에서 태어났으며, 몰년은 미상이다. 부친은 추희(樞熙), 모친은 영일정씨(迎日鄭氏)이다.
가계를 살펴보면 장수황씨의 상주 입향(入鄕)은 방촌의 제2자인 소윤공(少尹公) 보신(保身, 壽峰波)이다. 소윤공의 11세손 수간(秀幹)은 윤중(允中), 택중(宅中), 협중(協中) 3남을 두었는데 윤중(允中)은 후사가 없어 둘째의 장남인 집희(集熙)를 입양하여 후계를 잇고, 둘째인 택중(宅中)은 차남인 순희(淳熙)로 후계를 이었다. 셋째인 협중(協中)은 후사가 없어 소윤공의 11세손 해징(海澄)의 4남 추희(樞熙)를 입양하여 후계를 이었다.
상주에 내려올 때인 48세(甲子, 1864)의 자전기(自傳記)에 의하면 「10대에 사서를 외웠으며, 20대에 한양에 올라와 벼슬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30대에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40대에 전원으로 돌아왔다」라는 기술을 통해 인생의 대략만 알 수 있고, 이때부터 중모현에서 여생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졸년도 미상이다.
그의 후계를 보면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재선(載善), 차남 요선(堯善)이며, 그의 후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1녀는 경주이씨 이거명(李居明)의 37세손(상주 구계공 문중) 이종옥(李鐘玉)에게 출가하였으며, 묘(墓)는 상주시 모서면 화현리에 있다.
녹차가 태어날 때 모친의 태몽에는 손바닥에 붉은 난새(紅鸞)가 앉았는데 문수보살이 수십 명의 불니(佛尼)를 거느리고 와서 밥을 빌면서 ‘반드시 남자아이를 낳을 것이며, 오른 손바닥을 보면 붉은 문자로 오자(五字)가 쓰였을 것이다’라는 현몽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초명을 천로(天老, 里老)에서 ‘오(五)’로 바꾸었을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생일(生日)이란 시에서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출생에 관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불교적 사상에 따라 필연임을 나타내고 있다.
산곡과 동성이라 한안이라 호를 삼았고 山谷同姓稱漢案
동파와 동갑 년에 태어난 건 틀림없네. 東坡同甲正分名
생일은 천손이 은하를 건넌 15일 만이요 天孫渡河十五年
보암조사와 같은 해에 태어났네. 報庵祖師同日生
한편, 시집에 나오는 내용으로 일생을 좀 더 상세하게 추측해 볼 수 있겠는데 30세에 혼인을 한 후 32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36세 겨울에는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서책이 소실되었으며, 48세 때 자전을 쓰고 8월 하순에 상주로 낙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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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의 전경(인터넷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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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양주 용문산에서 10년, 한양에서 10년간 생활을 하였다.는 내용과 51세 때에 양주에서 31년을 살았다.는 내용을 볼 때 48세 때 낙향하였다가 새로 양주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묘는 모동면 신천리 산 1-4(N36°17′33.36″, E127°57′27.26.78″)번지에 있다.
또한, 자전에서 호를 녹일(綠一)라 한 것은 압록강의 이남 즉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것, 녹차(綠此)는 압록강 이남에서는 이 사람의 것이란 뜻으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족보에서는 녹차를 ‘시로써 세상을 크게 울리니 사람들이 녹차’라 하였다고 한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